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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 말로, 우리는 끝났다

이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by 정민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연애는 어떤 말 한 줄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사랑이 끝날 땐,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한 문장이 전부일 수도 있다는 걸.


그 말은 다름 아닌,

“너가 뭐라 하지 않는 거 나도 잘 아는데,

나는 너한테 술 마신다고 말하는 게 미안하고, 부담되고, 좀 불편해.”


나는 그 말에서 조용히 떠났다.

극적인 갈등도, 일방적인 외면도 없었다.

그날, 나는 말보다 큰 파장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 말은 단순히 ‘술’에 대한 해명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느끼는 불편함과 죄책감,

감정을 말해야 하는 피로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그는,

감정을 나누는 관계 자체가 버거웠던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조짐은 있었다.

말 대신 행동이 먼저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기척은,

바로 이 사건 이후에야 또렷해졌다.


각자 집에서 주말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실시간인 척, 미리 찍어둔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늘 먼저 보내오는 사람이었다.

마치 ‘나는 너에게 잘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사진은, 나를 위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대화를 이어가기보다,

‘괜찮은 남자’인 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드라마 보는데, 우리 얘기 같아.”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지만,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서,

말에 맞춰 감정을 얹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술에 취한 채

“이제 막 집에 들어왔다”고 연락했고,

곧 잠든 듯, 다음날까지 답이 없었다.


말 한마디로,

그날의 사진도, 대화도, 감정도

전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그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이, 거짓말은 싫다는 거였다.


그는 애써 안심시키려 하지도 않았고, 거리만 유지했다.

감정이라는 언어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미루는 데에만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의 방식은 늘 같았다.

피하고, 웃고 넘기고,

끝내는 외면했다.


그가 처음으로 보인 솔직함은,

감정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태도였다.


어쩌면 우리 관계는,

이미 감정을 나누지 않는 쪽으로 조용히 기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소리 없이 등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이 정말 멀어진 건,

그가 처음으로 나를 속였던 그날에 더 가까웠다.


감정은 변할 수 있지만,

함께 겪은 시간은 쉽게 잊히지 않을 거라 여겼다.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멀어졌고,

또 무너지듯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 말이 또 한 번의 사소한 균열일 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균열이 아니라, 단절이었다.


단절은, 평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늘 “내일을 위해 적당히 마셔” 정도로만 말했다.

술 마신다 하면, 잘 다녀오라고 했고,

몇 시에 들어가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의 시간을 존중하는 게 내가 지키던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는 전날에도 술을 마셨고,

그날 오후엔 해장하러 간다고 말했다.


나는 믿었다.

집에 들어갈 때쯤, 자연스레 연락이 오겠지 싶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미 감정은 서서히 기울고 있었고,

그의 말이 가볍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마지막 선은 지킬 거라 생각했다.

그 선은 단 한 번도 넘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지켜온 것들이 아직은 남아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밤부터, 연락은 없었다.


부모님과 사는 그는,

늦게까지 놀더라도 늘 한 번쯤 연락을 주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한 달 전에도 연락이 두절됐던 날,

막차를 타기 직전엔 결국 연락을 해왔다.


그런데 이날은 새벽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몇 년을 연애하면서도

단 한 번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그때,

평소에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그의 동생에게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어머니께서도 이미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하셨다는 말을,

동생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내게 되묻기까지 했다.

“혹시 언니랑 같이 있어?”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실종을 해명해야 하는 사람처럼,

입장을 설명하는 쪽이 되어 있었다.




그 새벽. 조용히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짧게 말했다.

“술 마시고 자버려서 택시타고 가고 있어.”

그리고 덧붙였다.

“술은 마시고 싶어서 마셨어.”


그 말엔 어떤 책임도 없었다.

단지 마시고 싶었다는 것뿐.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뒤를 잇는 말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이었다.


그 말에 담긴 미안함은, 나를 향한 사과라기보다,

자신의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감정보다 태도가 모든 걸 말해준다는 걸.


그날의 새벽은 그의 출근일이었다.

그런데도 술을 마시고,

아무 준비 없이 친구 집에서 잠들었다고 했다.


평소와는 어딘가 다른 선택이었다.

그 다름은, 말보다 더 큰 신호처럼 느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출근 전날엔 일찍 귀가했고,

서울에선 언제나 대중교통으로 돌아오던 사람이었다.

같은 친구와 이틀 연속 술을 마신 적도 없었다.


그날의 선택은, 그답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그가 내게 보낸 장문의 문자 속

‘미안하다’는 말은,

감정을 보듬기보다 감정을 피하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말하는 게 부담됐어.

불편했고,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아.”


사과 뒤에 감춰진 이 말은,

관계를 이어가기보다는

피하고 싶다는 본심이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관계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에겐 사랑이 더는 감당해야 할 감정이 아니었다.


그 순간의 냉정함은,

어쩌면 나의 일탈이었다.


슬픔은 그보다 훨씬 뒤에야 찾아왔다.




결국, 우리는 이별을 말하게 되었다.

싸움도, 눈물도 없었다.

다만 덤덤하게,

이제는 서로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며칠 뒤,

나는 그에게 조용히 고마움을 전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보자는 말은 없었다.

잘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만 담겨 있었다.


그건 이별 이후의 예의 같은 것이었고,

정말로 그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보낸 문자를 본 그는,

그날 아침, 나를 찾아왔다.


마지막 인사라고 여긴 내 메시지를 보고,

무언가를 말하러 온 줄 알았다.


그가 말했다.

“애들이 붙잡으래. 근데 내가 그랬어. 귀찮다고.”


단 하나의 말로 모든 기대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 말은, 너무 그다웠다.

그래서, 더는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


그 한 문장에 마음은 등을 돌렸고, 관계는 닫혔다.


문득 떠올랐다.


“너도 친구들 좀 만나.”

“집에만 있지 마.”


그 말들은 걱정이 아니라,

그저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명분에 가까웠다.


그의 말은 끝까지 방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내면서까지 지켜낸,

자기 자신에 대한 방어.


늘 그의 옆에 머물던 내가

그 말 한마디에 무너질 줄은, 우리 모두 몰랐다.


그건, 감정을 나누지 않겠다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더는 되돌아갈 수 없는 쪽으로,

서로를 조용히 내보낸 작별 인사였다.


사랑은 말로 끝나지 않지만,

어떤 말은 관계를 끝내는 출구가 된다.


나는 그 말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끝을 인정했다.


내 마음은 이미 정리되었고,

결심은 분명했다.


그날 이후, 뒤를 돌아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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