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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날 죄책감 느끼게 하지마

감정을 전하면, 그는 사라졌다

by 정민

감정을 말하는 순간,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사랑이 끝나기 전,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안심하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술자리에 가기 위해

그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TV가 켜진 집 안은 낯선 정적에 잠겨 있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우리는 같은 공간 속 서로를 외면했다.


그 침묵은 낯익었지만,

더 이상 편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는 따뜻하지 않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감정을 자주 나누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 정적은 내 안에서 더 또렷하게 퍼졌다.


나는 아직 말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로,

그 무너짐을 붙잡고 싶었다.


침묵은 그에게 익숙했지만

나에겐 ‘이대로는 괜찮지 않다’는 신호였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엔 우리, 훨씬 오래 같이 있었잖아.

요즘은 그냥 잠깐 스쳐가는 느낌이야.”


그 말엔 목소리의 날도, 비난의 감정도 없었다.

다만 조심스레 마음을 건넨 것이었다.

이 관계가 점점 얇아지고 있다는 감각을

그도 느끼고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단호했다.


“날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


그는 내 앞에 걸어와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말했다.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선언에 가까웠다.

내 감정은 닿기도 전에

그에게 비난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그 순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음을 전한 것이

그에겐 책임을 지우는 일처럼 들렸다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말이 닿지 않는, 메아리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감각에 가까웠다.


마음을 꺼내는 일은

곧 그 마음을 되돌려받는 일이었고,

같은 결말이었다.


감정이 닿는 순간,

그는 마치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굳어졌다.


누군가의 마음은 그에게 사랑이 아니라,

책임을 요구하는 고발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이미 익숙해진 반응 방식을 다시 겪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말은 또다시, 다른 의미로 되돌아왔다.


그 전에도 그는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

“나한테 그러지 마.”

그 말은 감정을 멈추고 대화를 닫기 위한

회피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닿기 직전,

그는 그 문장을 꺼내 들었고,

그건 관계의 접속을 끊는 스위치처럼 작동했다.


그는 내가 서운해한다는 걸 느꼈지만,

그 감정 앞에서 눈을 감았다.


나는 말투를 가다듬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음을 흘려 보냈다.


그런데도 그가 불쾌해했던 건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걸

내가 말로 꺼냈기 때문에 불편했을지 모른다.


그는 내 곁에 있다가도

친구의 술자리에 곧장 응했다.

내 말은, 그가 외면해온 마음의 덩어리에 부딪혀
결국 터져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자주 진실을 말해달라 했다.

스타일부터 계획, 인간관계까지.

뭐든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이 닿자,

표정부터 굳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넌 날 이해 못 해.”


그 말들은 금세 따라왔고,

그가 원한 건 피드백이 아니라

기분 좋게 포장된 동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정도 그랬다.

듣고 싶다고는 했지만,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말은 감정을 나누자는 제안이 아니라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율하라는 요청처럼 들렸다.


그는 분위기만 바뀌면,

감정도 저절로 사라진다고 믿었다.


말보다 공기의 흐름에 더 민감했고,
감정이 다가오면
“그만하자.”
“네가 그 말을 해서 내가 더 기분 나빠.”
그 말들로 그는 대화를 끊었다.


그는 불편함을 피하는 데 집중했고,
관계의 흐름을 쥐고 있을 때만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반응은 감정에 따라 매번 달라졌고,
그날 우리는 각자의 마음속으로 잠겨들었다.


이후의 시간은 말이 아닌, 정적 속에서 흘러갔다.


그날 내가 택한 조용함은 회피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마음을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감정을 꺼낼 때마다 거절당하면,

결국 사람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게 된다.




그것이 우리 사이의 마지막 언어가 되었다.


그날의 침묵은,

오래 맴도는 말보다 더 깊은 예고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말했다.


“나, 너한테 술 마신다고 말하는 게 부담돼.”


그건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 말은,

마지막까지 열려 있던 마음의 경로마저

조용히 닫아버리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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