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침묵을 사랑이라 믿었던 시간
관계의 시작은 설렘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설렘 속에도 끝의 단서는 있다.
어딘가 이상했지만 애써 넘겼던 순간,
말없이 지나간 감정, 흐르지 못했던 분위기.
지금 와서야 알게 된다.
그때의 침묵은 이미 단절의 신호였고,
감정을 숨기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만난 첫 장면이었다.
우리는 감정의 결이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시작했고,
그 어긋남은 처음부터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이 어색해서 더 말을 걸었다.
그는 그 침묵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작은 이미 끝의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천천히,
우리는 엇갈리는 시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이상했다.
말이 없는 건 조용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조용함을 이해하고 싶었고,
그래서 더 말을 걸었다.
조심스럽게, 반복해서.
그를 처음 만난 건 대학원 모임 자리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대학원생이 아닌,
후배의 초대를 통해 온 사람이었다.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고,
누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피식 웃으며 넘겼다.
자리에 있던 여자들은 그를 두고 수군거렸다.
"분위기 흐린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냐", "예의가 없다." 그 말들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울릴 의지도,
분위기를 고려하려는 시도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외면당한 사람들의 기분보다,
그가 왜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을 고르고,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너도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나도 그런 날 있거든.
근데… 같이 2차 가자.
멀리서 왔는데 그냥 가면 아쉽잖아.
내가 도와줄게.”
그건 어떤 의미에서 초대였고,
용서였으며,
연대의 말이었다.
그는 따라왔다.
그리고 나중에 말했다.
“그 모든 모습이 재밌었다”고.
나는 웃었다.
나를 낯설게 만들었던 그 사람에게서
‘재밌었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왠지 잘해낸 일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던 사람에게
내가 손을 내민 순간,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의 그는 ‘과묵한 사람’처럼 보였다.
말은 적지만 집중해서 듣는 사람,
시끄러운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감도를 가진 사람.
거칠어 보였지만 속은 고요한 사람.
그 고요함은 나에게 듬직함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고요함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의 생각은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아꼈던 것이 아니라,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침묵은 그의 태도였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거리두기 방식이었다.
시작하되, 들어오지는 않는 사람.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이미 모든 단서가 있었다.
감정을 말하지 않는 사람,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사람,
다가가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걸 외로움으로 해석했고,
나만큼 복잡한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해석 속에서 스스로 역할을 만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땐 몰랐다.
그 해석 하나가,
이 관계를 시작하게 만든 착각이 될 줄은.
우리는 말이 통해서 가까워진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를 덜 상처입히는 존재로 오해했고,
그 오해 위에서 친밀감을 쌓아갔다.
하지만 감정은 언어로 확인되어야 하고,
관계는 말로 다져져야 한다.
그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뚜렷한 거리로 바뀌었고,
나는 그 침묵을 끝까지 해석하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는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처음부터 그 말을 대신 만들어주려 했다.
그는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유지하려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틈을 해석하고 채우려는 사람이었다.
관계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이미 다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그가 외롭다고 느꼈고,
그는 나를 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나는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고,
그는 감정을 숨겨야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말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던 마음은 결국,
말이 없는 사람을 끝까지 해석해야 하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안다.
어떤 시작은 설렘보다,
마음의 흐름을 더 조심히 살폈어야 했다는 걸.
나를 보호하려고 거리를 두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며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만나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 자꾸 어긋나게 된다는 것도.
그날 나는 그의 말 없음을 고요함이라 착각했고,
말하지 않는 태도를 솔직함으로 오해했다.
그 오해는 나를 그에게 더 다가서게 했고,
이후의 모든 순간을 나만 설명하게 만들었다.
사실은,
첫 만남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은 그 자체로 마음의 표현이었고,
나는 그걸 너무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는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고,
그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