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을 무렵, 둘째가 바다를 보러 가자고 성화다. 본래 야경을 좋아하기도 했고 차 타는 것을 즐기는 아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심하게 졸랐다. 졸라대는 모습조차 귀여웠던지 아빠는 흔쾌히 오케이사인을 던졌다. 운전수는 난데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다. '그래, 가자는데 가주지 뭐, 나도 오래간만에 밤바다나 실컷 보고 와야겠네.' 휴무인 할머니도 함께 길을 나섰다. 아빠보다 더 우람한 아들, 통통한 딸까지 타니 차가 꽉 찬다. 언제 이만큼 컸는지, 이럴 때마다 세월의 속도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내비게이션에 진하해수욕장을 찍어보래서 일단은 진하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해수욕장이 별 다를 게 있을까? 처음 가는 곳이라 기대감으로 부푼 체 도착했다. 역시나 별다를 게 없이 모래반, 물반이었다. 축구부버스가 보이고 백사장 위 도로변에서 줄넘기삼매경인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아마도 훈련을 온듯했다. 해수욕장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신박하긴 했지만 내 부푼 기대감은 묶지 않은 풍선이 바람 빠지듯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랑도 별다른 것들이 눈에 띄지 않자 간절곶으로 가보자고 했다. 여기서부터 7분 정도 소요된다 하니 못 갈 것도 없었다. 화장실만 경유하고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간절곶 역시 처음 가보는 곳이라 그랬던 걸까? 바람이 다 빠져 쭈글 해진 풍선이 기대감에 다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해돋이 명소답게 주차장부터 꽤 드넓었다.
주차 후 불빛이 보이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바다 쪽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호미곶에서 자란 나는 곶(串)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반가움에 더욱 호감이 간다. 티브이나 사진에서만 보던 그 풍차도 보였고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감싸진 나무도 있었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계획도 없이, 갑작스레 오게 되니 반가움과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을 때 기쁨은 더 큰 법이라던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한집에 같이 살아도 할머니와 함께 나온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 할머니와의 시간이 더욱 뜻깊기도 했다.
풍차를 뒤로하고 언덕을 올랐다. 1박 2일 프로그램에서 간절곶이 나왔을 때 신기하게 바라봤던 큰 우체통도 직접보고 간절곶이 새겨진 돌덩이도 보고, 어린아이처럼 신나고 들떠서 두리번거리며 사진 찍기에 바빴다. 등대도 오래간만에 봤더니 신기하기도 했고 등대불빛을 따라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새해 첫날 아침, 티브이를 통해 일출을 보았고 그러는 바람에 소원도 못 빌었는데 등대 불빛을 빌려 소원도 빌고 왔다. '해만 보고 빌으란 법 있나? 장소가 무슨 상관? 절실한 마음이 중요한 거지'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때와 장소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간절한 마음이면 족하다 여겼다.
해변을 걷는 길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하신 바다에 관한 추억도 들려주셨다. 문어를 잡게 돼서 술안주 생겼다고 신나 하셨는데 고둥 잡다가 놓친 이야기였다. 이렇게 바다에 와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함께함이 기쁨이었다. 기쁨이 체 가시기도 전, 장난꾸러기 아빠는 아이들을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팔짱 끼기 싫어 버둥대는 딸아이와의 신경전을 벌이지 않나, 잘 걸어가는 아들 발을 걸려하지 않나, 짓궂은 행동에 할머니도 혀를 내두르셨다.
'우리 아빠는 참 무뚝뚝했는데...' 군인이라서 그럴 거라 수용하며 살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보니 성격이었다. 나의 시선에서 신랑 같은 아빠는 200점짜리 아빤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 빛을 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애들이 안 놀아준다고 나한테 징징거리기까지 한다. 그런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 애교 부리고 한창 키울 맛 나던 그때는 일하느라 옆에 있지도 못했는데 정작 함께 놀고 싶어 지니 커버린 아이들은 곁을 쉬이 내주지 않아 속상할 노릇이다. "우는 거 아니지?" 매번 눈가를 확인해 본다. 마음 여린 신랑이 혹시라도 눈물바람할까 봐서 걱정되는 마음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받아들여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내속도 말이 아니다.
낮은 따뜻했는데 밤바다는 역시나 차다. '신랑의 마음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으려나?' 자꾸만 눈치 아닌 눈치를 보게 된다. 그래도 아빠와 티키타카가 좋은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수다삼매경이다. 왕복 2시간 동안 차 안에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사춘기라 하더라도 소통하는 데에 있어서 차 안만큼 좋은 공간도 없는 것 같다. 할머니와 우리 부부,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눴다. 할머니는 아직 정정하시기도 하고 60 중반이시라 젊은 할머니에 속한다. 나이 50에 할머니로 만들어드려서 죄송스럽긴 했지만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해 주셨던 분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함께 살게 되었는데 드린 것보다 늘 받기만 했던 우리였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모시고 다니려고 한다. 오늘도 그러했고 함께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받은 것을 보답해 드리는 게 인지상정, 오늘도 잘한 나, 칭찬한다. 3대가 함께하니 이런 재미와 기쁨이 있을 줄이야. 감개무량했다. 좋아하시는 표정이 역력한 할머니, 밖에만 나오면 좋아서 꼬리가 살랑거리는 강아지처럼 들뜨는 아이들과 나. 가족과 함께하니 즐겁지 아니한가. 간만의 소통과 교류에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에 통닭 한 마리를 포장해 와 새로운 이야기로 야식타임을 즐겼다. 야식을 안 먹는 집이지만 한 번쯤 이런 자리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 한자리에 모여 있고 먹을 것도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자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은 지상에 있는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가정을 작은 천국이라고도 하지 않나.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하고 감사할 일이다. 한자리에 둘러앉아 다 같이 식사하는 일이 어려워진 요즘이지만 그 자리를 자주 만들어볼 참이다. 어느 관계든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가족도 예외는 없을 테고.
흔들릴 때도 안아줄 수 있는 곳, 엄마품처럼 포근한 곳, 어느 모습이라도 그대로 바라봐주는 곳,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한 곳이 가정이란 걸 아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 엄마인 나부터 그런 곳으로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지.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