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복 사진에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입었던 옷이라서 그랬던 걸까? 그 세월이 그리워서일까? 나도 모르게 금세 울컥해졌다.
2003년, 나는 병원에 취직을 했다. 3교대근무를 하는 회사에 다니며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녔다. 그때부터 그냥저냥이 아니라 열심을 다해 살아왔다.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새로운 꿈 앞에 두려움보단 기대감과 설렘으로 힘든 것도 모르고 지냈다.
간호학원을 처음 찾아갔던 날이 떠오른다. 일을 다니긴 했지만 내 수중에 학원비를 낼 목돈은 없었다. 카드도 없었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으며 지냈던 터라 학원 등록부터 높은 산을 만난 느낌이었다. '아~진짜 배우고 싶은데...' 원장님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셨던 걸까? 배우고 싶어 하던 내 의지를 높게 사셨던 걸까? 원래는 안 되는 일인데 현금할부를 해주시겠다고 먼저 제의해주셨다. 너무 감사했던 나머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학원문 나설 때까지 해댔다. 나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등록하기로 하고 나오는 길, 가슴 벅참과 감동, 기쁨과 감사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학원바로밑 유 x국밥집이 있었는데 구수한 향기조차 내 눈물을 막진 못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인생을 준비하게 되었다. 10개월의 이론공부와 2달의 병원실습으로 1년의 과정을 수료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열심을 다했고 그 모습을 이쁘게 보신 원장님께서 친구분이 사무장으로 계신 병원을 추천해 주셨다. 시골이긴 하나 수술도 하고 배울게 많을 거라고 하셨다. 배움에 머뭇거림이 없는 나는 무조건적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료가 끝나자마자 숨돌릴세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직하게 됐다. 사무장님께서 병원 앰뷸런스로 직접 나를 데리러 오셨다. 책과 나무책장만 해도 한차 가득이었다. 나의 짐은 구미에서 성주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동네였고 갈수록 시내를 벗어나 시골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병원으로 가던 차 안에서 내시선을 이끄는 건 하얀 비닐하우스뿐이었다. 성주가 참외로 유명하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성주로 오기 전까지 어디에 붙어있는 동네인지, 무엇이 유명한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미지의 세계 같았다.
병원에 도착해 4층에 있는 기숙사로 짐을 날랐다. 파란 수술복을 입고 계신 남자분 한 분이 나와서 거들어주셨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당직을 서고 계신 x-ray실장님이셨다. "왠 짐이 이렇게 많아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툴툴대지 않고 4층까지 옮겨주셨다. 감사했고 죄송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도착한 방에는 2살 어린 간호사가 있었다. 당직근무 중이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고등학교후배였다. 후배는 졸업 후 바로 간호학원을 나와 병원으로 취직을 했다. 포항에서 연고도 없는 성주까지 왔다는 게 신기했다. 같은 학교, 같은 과를 나온 동생이었는데 자기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했다. 일찍 자기 길이 아님을 깨우치고 다른 길을 선택한 후배가 커 보이기까지 했다.
취직하게 된 병원은 시골에 있는 병원이었지만 작지 않은 스케일의 병원이었다. 간호사 5명, x-ray기사님 2명, 물리치료사 5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술실은 물론 병실에, 식당까지 절대 작은 병원이 아니었다. 환자도 많고 할 일도 많았지만 배우는 것은 재밌었고, 직원들과 친해지다 보니 병원생활을 몇 년 한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웠다.
시간이 갈수록 아픈 분들에게 위로도 건넬 수 있는 아량이 생겼고, 많은 병들을 접하며 몸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숙소를 함께 쓰던 간호사들과의 우애도 다졌다. 병원생활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나와 잘 맞았다. 손녀 같다고 매일 껌 한 통 씩 주시던 할아버지, 참외농사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하시지만 시시때때로 참외를 가져다주시던 어르신들의 사랑은 일하는데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고 식당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했다. 열정 가득한 원장님 덕분에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외과수술은 기본이고 정형외과수술도 집도하셨기 때문에 다양한 수술을 접할 수 있었다. 수술에 참여해 어시스트를 잘 해낼 때 받는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하늘 끝까지 올려주는 로켓이 되어주었다.
수술실에서 C-ARM 이란 영상장비도 처음 보았다. 이장비는 큰 병원에만 있는 장비다. 정형외과 수술 시 쓰이는 장비인데 엑스레이가 사진이라면 씨암은 동영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골절된 부분을 당겨서 바로 맞출 때나 그 후 철사로 고정할 때 보면서 할 수 있는 장비였다. 이런 큰 장비가 개인병원에 있다고 하면 이 장비를 아시는 분들은 깜짝 놀란다. 그만큼 환자들에게 진심이셨고 열정적이셨다. 그 열정과 진심이 전염되었는지 병원식구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뜨거웠다.
저 사진을 보고 울컥했던 건 병원생활의 행복감도 있었지만 슬펐던 기억도 있었기 때문이다. 병실이 19개 정도 있었는데 수술 후 안정, 노환으로 계신 분도 계셨고 혹은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연명 아닌 연명을 위해 계신 분들도 계셨다.
병원에 들어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당직근무도 배워야 했기에 일요일도 집에 가지 않고 숙소에 있었다. 그날 당직은 수간호사 언니였다. 이분은 간호사출신이었고 우리 조무사들과는 또 다른 당당함과 여유가 있었다. 약간의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지만 부러움이 더 컸다. 당직자들은 원장님의 오더에 따라 아침, 점심, 저녁에 따라 주사와 약을 투여한다. 그날 아침, 당뇨합병증으로 입원하신 할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퉁퉁 부은 팔은 수액치료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 몸이 수액바늘을 밀어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깊게 쌓인 눈을 밟으면 푹푹 꺼지듯 할머니 팔은 잡기만 해도 잡은 부분은 푹 들어갔다. 나는 비위도 좋고 담담한 편이라 웬만한 일들은 거뜬히 이겨내는데 그날만큼은 쉽지 않았고 힘들었다. 몇 시간 뒤,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살면서도, 병원일하면서도 '사망'을 눈으로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무섭고 아찔했으며 두렵고 슬펐다. 지레 겁먹어 얼음이 되어있던 나와는 다르게 수간호언니의 처치는 달랐다. "할머니, 고생 많으셨어요. 자식도 많다던데 키우느라 고생하셨고요. 이제는 아프지 않은 곳에 가셔서 편히 쉬세요" 할머니 귀에 대고 귓속말하듯 담담하게 마지막인사를 건네셨다. 가족에게 연락을 드리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그 인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심장은 멈추겠지만 제일 나중에 죽는 게 귀래. 그러니 너도 혹시 일하다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되면 꼭 인사해 드려. 알았지?"
병원일을 하다 보면 당연 일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배울 때도, 인생의 이치를 배울 때도 있다. 농사일로 굽어진 허리와 다리를 해서도 자식뒷바라지하는 부모의 사랑도, 유척상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픈 분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도, 환자를 가족같이 여기고 성심성의껏 대하려 하는 이타심까지 배우게 됐다.
40넘은 지금도 나는 자라고 있고 배우고 있다. 지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거름이 되어주었기에 뿌리가 튼튼한 나무로 자랄 수 있었다. 아직 키도 더 자라야 되고 열매도 맺어야 할 시간들이 남아 있다. 만약 그때 그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지금만큼 자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준 그 시절에 감사한다.
매일 수술복을 근무복으로 입던 엑스레이실 실장님, 나의 이삿짐을 날라주셨던 감사 했고 고마웠던 그 실장님을 오늘 몇 년 만에 뵙고 왔다. 실장님의 아버지빈소에서.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더욱 울컥 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