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주면 할래? – 알려주면 당연히 하지!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마주치는 것 중 하나가 인내다.
그 인내를 얼마나, 어떻게 발휘하느냐에 따라 삶이 크게 달라진다.
너무나 당연하고 진부한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왜 누구는 버티고, 누구는 포기할까?
모두가 인내의 가치를 아는데도 말이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이겨내고 어떤 사람은 넘어서지 못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의지력’ 같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대 신화 속 웅녀가 21일을 버텼다는 이야기, 물론 설화겠지만 마음속에 드는 생각 한 가지. 이게 정말 단순한 의지력이라고?
“도대체 어케 했누?”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조선시대의 노비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참혹하고 부당한 조건 속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덤덤히 순응했다는 뜻은 아니다.
도망하고 저항한 기록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당수는 그 체제를 ‘삶의 질서’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살아갔다.
그러니 그들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등의 좋고 나쁘다는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양반보다 훨씬 힘이 세고 관군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가진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지금 돈이라고 하는 종이의 가치를 인정하고
인생의 대부분을 내던지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너와 날 모두 죽일 총은 불충분하더라도,
우린 다스릴 돈은 수두룩하지 않은가.
이 장면들이 말해주는 것은 단순하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이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을 때라는 것이다.
반대로 고통에 의미가 부여되면, 인간은 놀라울 만큼 강해진다.
돈, 명예, 신념, 가치, 필요—
무엇이 되었든 ‘이것을 견딜 이유가 있다’고 믿는 순간
인간은 때로 잔인할 정도로 버틴다.
이 의미부여는 타인에게서 주어질 수도 있고,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 놀랍게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후자는 훨씬 드물고, 훨씬 강력하다.
정치 지도자나 거대 기업 창업자처럼
확고한 자기 의미 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비판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이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이 옳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견딘 고통의 크기가
자신이 부여한 의미의 크기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편협해지지 말라고 충언을 하고,
더 중요한 다른 것을 보라고 해도, 그들은 그럴 수 없다.
모든 이에게 공유되는 절대적인 진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했다가 다시 창조되기 마련이라는 점 – 진리라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이것,
의미부여는 창조되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한 번 창조된 그것은,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 한해 절대적이라는 점.
위 내용을 상기하면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현상은 우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싼 자동차나 집,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 등에 열광하며
타인에게 우쭐거리기 좋아하는 우리도 사실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전하게 이동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자동차,
생존에 문제되지 않고 안락한 적당한 집,
추위에서 몸을 보호해주고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옷,
포만감을 주는 위생적인 음식—
그 정도면 사실 충분하다.
그러나 그런 수준에 만족하는 현대인은 보기 드물다.
그런 만족을 찾으려면 종교인을 찾아야 한다.
수도승, 스님, 유명한 봉사자 등,
성인이라 불릴 만한 위인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과거의 노비나 현재의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대가 부여한 의미 체계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시대는 신분을,
어떤 시대는 소비를,
어떤 시대는 신념과 가치를 인간에게 준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의미에 기대어 살아가고, 견디고, 포기한다.
몇 백 년 뒤의 누군가는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젠장,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데?”
그때의 누군가는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이유? 네가 찾아봐. 찾고 나면 이것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어. 과거에는 종이조각 1억개 주면 더한 일도 즐겁게 했다잖아.”
미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믿는 것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종이돈과 소비를 신봉했던 것처럼,
또 다른 시대는 또 다른 의미를 ‘당연’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결국 인간은 언제나 의미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 의미가 바뀌면,
견딜 수 있는 것과 견디지 못하는 것의 경계도 함께 바뀐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웅녀에게 곰으로 산다는 것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 상이한 두 삶의 차이가 주는 의미부여는 무엇이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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