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원과 로열티
'한 알의 씨앗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작물육종의 선구자 고 우장춘 박사는 '씨앗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이다'라고도 하였다. 종자는 지구촌 어디든 국민의 먹거리 확보와 함께 식량 안보를 담보하는 매우 중요한 생명체이다. 우리나라는 4계절이 뚜렷한 온대 기후 지역으로 다양한 작물과 채소, 야생화, 약초 등이 들과 산에 널려있는 식물 유전자원의 보고라고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두 개의 중대 병력을 동원하여 국내 수많은 유전자원을 수집해 갔다. 6.25 전쟁 당시 미국과 독일에서도 우리의 금쪽같은 토종 자원을 수집해가서 자국 품종 개발에 사용하였다. 우리의 들과 산에 자생하는 귀한 씨앗들을 채취해 갔어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가슴 아픈 사연이다.
우리 토종식물이 소중한 이유는 겨울 한파와 여름 혹서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병충해에 강한 데다, 고유의 맛과 향을 지닌 신비의 생명체로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이다. 과거의 농사기술이나 비료와 농약이 지금처럼 좋았던 시절이 아닌데도 토종 종자가 지금까지 유지돼 왔던 것은 열악한 환경 여건에도 강한 생명력(DNA)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리 토종이 외국으로 유출되면, 그들은 종자의 유전적 장점만을 살려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켜 돈을 벌어 낸다는 것이다. 세계 선진국의 경제 기반은 농업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식량 공급 기지로서의 역할은 영원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에게 먹거리를 안전하게 제공하는 종자 산업이야말로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이다'라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자국의 고유품종이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며 종자를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식물 종자를 둘러싼 국제간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필자가 2011년 농촌진흥청 KOPIA 캄보디아 센터에 파견되었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사료용 옥수수(Maize) 품종 개발이었다. 캄보디아는 옥수수 수요가 많은데도 자체 품종 개발이 어려워 태국 종자를 사용해야만 했다. 당시 한국 품종과 현지 재래종, 태국 종자를 비교 평가하며 캄보디아 여건에 맞는 우수한 종자를 선발하는 과정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2020년 캄보디아 최초 1대 잡종 옥수수(사료용) ‘CHM 01’을 신품종으로 등록하게 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2010년에 전임자가 시작했던 종자사업이 나를 거쳐 후임자까지 무려 10년 만에 캄보디아 신품종 개발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우리 식량을 자급 달성시켜주었던 '통일벼'는 필리핀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단기간 내에 만들어낸 기적의 볍씨로 잘 알려졌다. 보통 벼 신품종을 육중해 내려면 한국에서는 10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신품종을 개발해 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신품종 개발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자체 육종보다는 외국 품종을 도입하여 재배하고 있다. 해외에서 개발하거나 외국 종자기업의 종자를 사용하면 로열티를 지급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IMF 당시 국내 종자 회사들이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매각되면서 종자산업 기반이 약화되었다. 심지어 우리가 개발했던 '청양'과 '금싸라기'같은 품종이 외국계 종자회사로 팔리면서 우리가 개발했던 종자임에도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딸기 버섯 등 우리나라 12개 작물의 연간 로열티 지불액은 2010년 160억 원에서 2020년 80억 원으로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이다. 이유는 2010년 국산 품종 보급률이 2010년 16%에서 2020년 29%로 두 배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국 종자를 도입하면 로열티를 부담해야 하므로 '종자산업 육성은 종자전쟁에서 이기는 무기'라 할 정도로 중요하다.
최근에는 해외로 수출되는 국산 품종도 증가하여 로열티 부담은 줄면서 오히려 로열티를 벌어들이기도 한다. 우리가 벌어들이는 로열티는 연간 약 22억 원 정도라 한다. 국산 품종이 있으면 로열티 협상력도 높아져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 품종이 없을 때는 장미 한그루 3천 원이던 로열티 값이 1천 원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그만큼 농가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독과점일 때보다 협상력이 높아졌기 때문에 국산 종자 개발이 중요하다. 금값보다도 비싼 종자도 있다. 파프리카와 토마토 종자가 대표적인 금값 종자이다. 파프리카 1g의 종자값은 9만 7천 원인데 금값보다 1.5배 비싼 값이다. 토마토 종자도 금보다 1.8배가 비싸다. 세계 각국이 종자산업에 매진하는 이유는 종자를 개발하면 돈이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농촌진흥청이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1975년 국내 최초로 종자은행을 설치하고 국내외 유전자원을 수집한 결과 현재 보유 중인 유전자원 수는 26만여 점이나 되어서 미국, 중국, 인도, 러시아에 이어 세계 5대 종자 보유국으로 등극하는 등 종자강국의 반열에 들어섰다. 한반도에서 수집해 간 토종 유전자원의 반환운동도 적극 펼쳐, 미국 일본 독일 등으로부터 5천여 점의 토종 유전자원을 반환받아서 품종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 품종의 종자 자급률은 벼, 보리, 무, 고추, 수박, 오이, 참외, 딸기, 접목 선인장 등의 자급률은 90% 이상이지만 양파, 토마토, 장미, 국화, 복숭아, 사과, 배, 포도, 감귤 등 과수와 화훼 자급률이 낮은 실정이다. 이유는 1960년대부터 벼 품종 개발에 주력하면서 1972년에 기적의 볍씨라 불리는 통일벼가 개발되었다. 1978년에는 쌀 자급을 이루면서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녹색혁명을 완수하였다. 이처럼 쌀 연구에 집중하다 보니 과수, 채소, 화훼 품종 개발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시작되어 2000년대 초반부터 국산품 종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과수, 화훼 품종 개발 기간은 보통 10년~15년이 필요하고, 품종을 보급하는데도 많은 기간이 소요되어 보급률이 급히 늘진 않지만 앞으로 국산 품종 보급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 어른들은 가을에 농산물을 수확하면 가장 실한 종자를 처마 밑에 매달아 다음 해 농사에 대비하셨다. 벼, 옥수수, 조, 수수 등은 쥐 나 새들의 먹잇감이 될 수가 있어 곳간 안전한 곳에 보관하지만, 야생들과 함께 살아가는 넉넉함도 보여주셨다. 우리가 하루 세 끼씩 먹는 음식이 농부들의 정성과 땀의 결실이며, 연구자들의 격렬한 종자전쟁을 치르며 만들어진 노력의 소산임을 잊지 말자. 한 톨의 쌀알이라도 아껴가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