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의 과일과 유전자원 확보
다산 정약용은 그의 문집에서 "농민은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라고 하셨다. '농민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더라도 씨앗만은 이듬해 농사를 짓도록 남겨야 한다'라는 종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배고픔의 서러움을 겪으며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난 70여 년동안 세상이 많이 변하여 주식인 쌀을 하루 세끼씩 먹은 것이 탄수화물 과다 섭취로 성인병 원인이 되고 있다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건강 대비책으로 '채소와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생활형편이 좋아지면서 국민들의 과일 소비가 늘고 있으며, 우리 입맛에 맞는 과일 품종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사과, 배, 포도, 딸기, 수박 등 우리 과일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그 품질이 우수하다는 것은 외국을 다녀보면 일 수 있다. 우리 땅에 맞는 품종 개발도 원인이 있지만, 4계절이 뚜렷한 기후조건도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기후변화로 제주도에서만 재배되던 감귤이 육지에서도 가능해졌고, 평야지에서 잘 자라던 사과가 이제는 무주, 진안, 장수 같은 산간지에서 가능한 것으로 변하고 있다. 또한 바나나, 용과 등의 열대과일을 생산하는 농가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따른 기상여건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대처방안이 시급하게 해결해가야 할 과제이다.
필자가 캄보디아에 7~8년 살면서 매일 아침 사과 한 알씩은 먹었다. 캄보디아에서는 거의 재배되지 못하므로 사과가 고급 과일로 값도 비싼 편이다. 대부분이 중국산이나 당도나 사각거림, 모양 등 식감이 우리 것에 비교가 되질 못했다. 국내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과는 일본산 후지 계통이 대세를 이루어오다 요즘은 국민들의 소비 트렌드에 맞는 국산 품종으로 점차 변해가고 있다. 먹기 쉬운 작은 열매와 껍질 채 먹을 수 있는 과일을 선호하는 추세에 맞추어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사과 '아리수' 품종이 개발되었다. 이것은 식감이 좋고 당도도 높으며 크기에 따라 기내식, 학교 급식용, 군납용으로도 수요가 늘고 있다. 여러 나라 사과 맛을 보았지만 우리처럼 사각거리며 향이 있고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룬 사과를 본 기억이 없다. 외국 사과는 모양이나 색깔도 우리처럼 일정하지 않고 겉껍질도 곱지 않았다. 품종의 우수성도 있지만 농민들의 기술 수준도 높기 때문이다.
외국의 배는 조롱박 모양이나 야생 똘배처럼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시원스러운 과즙이나 당도 등 식감에서 우리 것과 비교가 되질 못한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일본산 '신고배'가 대표 품종이었다. 본 품종은 수확 시기가 10월 중순 이후여서 추석이 10월 초일 때는 추석 대목에 맞추기 위해 성장촉진제로 익힌다. 이런 배는 쉽게 무르고 식감이 좋지 못한 상태로 유통되어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청에서는 9월 중순에 수확이 가능한 조생종 품종을 개발하여 추석 때 차례상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1인 가구 증가로 간편하게 먹으려는 소비추세에 따라 배 역시 크기가 작고 껍질채 먹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껍질 채 먹는 배 품종으로 '조이스킹, 슈퍼골드, 한아름'등이 있다. 배의 껍질에는 '알부틴'이나 '리그닌' 같은 기능성 성분이 많아 과육보다 많은 영양소를 모두 섭취할 수가 있어 기관지 장애, 숙취제거, 치아 플러그 제거에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품종들은 석세포가 적어 식감이 좋고 수분이 많으면서 당도가 높다. 외국의 배는 크기도 일정하지 않고 울퉁불퉁 볼품이 없으며 맛도 퍽퍽한 못난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외국의 포도는 포도주용으로 개발되어왔고, 우리는 생과용 품종으로 개발하였다. 우리의 포도는 송이 알이 빈틈없이 탐스럽게 차있고 색깔이나 당도가 뛰어나, 생과용 역시 추종을 불허한다. 농촌진흥청에서는 2014년에 '홍주 시드리스'라는 씨가 없고 껍질채 먹는 포도를 개발했다. 최근 소비자가 즐겨 찾고 있는 '샤인머스켓'은 일본에서 개발한 품종이었으나 재배가 까다롭고 송이가 너무커 상품성이 떨어진다. 이 같은 재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송이 크기를 적당하게 조절하는 생산기술을 정립하였다. 소비자는 샤인머스켓을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농가들에게는 중국이나 베트남 홍콩 등 7개국에 수출하여 소득을 올리는 효자 작목이 되었다.
캄보디아에서도 딸기 소비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고지대에서 일부 생산될 뿐 태국이나 중국에서 수입된것이어서 신선도나 당도, 단단함 등 우리 것과는 비교가 되질 못했다. 한국의 딸기는 10년 전만 해도 일본 품종이 대부분이었고 국산품종은 10% 정도였으나 '설향'딸기가 2012년에 개발되면서 판도를 바꾸었다. 10년 정도의 짧은 연구기간에도 일본 품종보다 수량이나 병해충에 강한 국산 보급을 96%까지 올렸다. 그동안 일본에 주었던 70여 억 원의 로열티도 절감하였다. 국내 딸기 '설향' 한 품종에 편중된 것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맛과 향이 좋고, 크고 단단한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아리한, 킹스베리, 산타' 품종은 전용 비행기를 전세 내어 수출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 수출 효자품목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농촌진흥청 유전자원센터에는 벼 콩 등 식물 유전자원 23만 7천여 점을 보관하고, 딸기 마늘 등 영양체 작물은 2만 6천여 점, 등 26만 3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유전자원 수집의 역사가 50년 정도인 나라에서 이 정도의 유전자원 보유는 세게 5위의 종자강국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종자은행시설은 세 가지 권역으로 구분하여 보관하고 있다. 종자를 4도 정도의 온도에서 30년 이상 저장할 수 있는 중기 저장고, 영하 18도에서 100년간 저장하는 장기 저장고가 있다. 또한 딸기와 같은 영양체를 급속히 얼려서 영구보존이 가능한 영하 196도의 초저온 저장고가 운영되고 있다. 유전자원을 수집하는 것만큼이나 보존과 활용이 중요하다. 유전자원을 안전하게 보존하지 못한다면, 세계인의 자산인 종자를 싹 틔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농진청의 종자은행은 리히터 규모 7 이상의 강한 지진과, 전쟁으로 인한 폭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가 돼있다.
지구는 온난화가 급속히 진행 중으로 여름철 폭염과 집중호우, 지진과 태풍, 한파 등 이상기후가 심해지고 있다. 이런 변화에 적응하고 극복하려면 유전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유전자원은 식품소재뿐 아니라 신약개발을 위한 소재로도 활용되므로 유전자원을 잘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식량위기에 대처하고 지속 가능한 생명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유전자원 확보와 활용이 중요하다. 우리 과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었다. 다양한 유전자원의 확보야말로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품종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맛있는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땅에서 태어난것에 감사하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