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시도에게
시간은 말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히 흘러. 너희가 부자여도, 너희가 가난해도, 행복해도, 불행해도. 그래서 때로 시간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시간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지.
너무 장황하네. 속마음을 다 털어내기 무서워서 그런가 봐.
시간이 없다.
나이가 들면 삶이 다양한 역할로 채워져. 아들에서, 학생이란 역할이 추가되고, 친구란 역할, 나중엔 동료, 남편, 그리고 아빠.
그러다가 아들이란 역할을 잠시 잊었어. 돌이켜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아들이란 역할이 해야 할 일이 바뀌었네.
할머니는 대장이야. 70년대에 갓난 아들을 한국에 두고 홀홀단신으로 미국에서 꿈을 이루려 왔어. 아버지도 없이 시장에서 꼬다리 야채를 팔던 그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할머니가 말이지. 그래서 교수가 되었고, 아들을 하나 더 낳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네—아빠도 참 많이 다닌 것 같지만 아직도 할머니만큼 못 다녔단다. 할머니의 동생들은 그저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지. 그리고 그만큼 동생들 잘 되라고 기도로, 조언으로, 때론 물질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셨어.
그렇게 가족의 대장이었던 할머니는 아빠가 머리가 굵어져도 쉽게 범접할 수 없었지. 그래서 그렇게 아빠랑 할머니는 싸웠나 봐. 아빠 의견도 있는데, 아빠 못지않게 배움이 있으신 할머니는 본인 의견을 쉽게 굽히지 않았어. 티격태격할 수밖에. 아빠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니까.
아빠는 할머니와 높은 언성이 오고 간 뒤에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항상 후회했지. 그런데 말이야.
언제가부터 할머니가 아빠의 날카로운 지적을 되받아치지 못하시더라. 그땐, 그게 역할이 바뀐 거란 걸 몰랐나 봐. 시간이 지나버린 거야. 할머니와 아빠의 티격태격하는 역할극은 이제는 과거의 산물이 되었어.
그리워.
새 역할극에도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역할극에서 아빠는 어떤 역할을 할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전과 다르게 시간이 공평하지만 유한하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는 거야.
지금에만 할 수 없는 걸 하자. 다음이란 없을 수 있으니.
멀리 한국에서 건강검진을 받으시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아빠에게 아빠라는 또다른 새 역할을 준 너희와 함께,
오늘은 텍사스에 첫 눈이 올지도 모른대. 너희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 볼까 기대해 봐.
너희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