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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까지 가서 러닝을 하는 이유

오늘도 도시 하나를 더 알아가고, 더 느껴간다.

by 이어진

여행 중에 러닝을 하는 걸 좋아한다. 전날 과음을 한 탓에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에도, 날마다 2만보씩 걸어 발목이 너덜너덜해졌대도 기어코 뛰러 나간다. 같이 술을 퍼마시던 여행 메이트가 "뭐? 내일 새벽에 러닝? 이렇게 술 먹고? 백퍼 불가능~"하며 자존심을 건드려주면 오히려 좋다. 못난 자존심 때문에라도 러닝화를 신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음한 다음 날, 혼자 새벽 에펠탑 러닝

지금까지 수많은 도시에서 러닝을 했다. 파리, 바르셀로나처럼 낭만 가득한 유럽에서도, 다낭, 속초까지 떠올리기만 해도 맘편한 도시에서도 나는 달렸다. 이쯤 달리다보니 이제 여행 중 러닝은 내게 일종의 의식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이번에는 어디를 달려볼까?'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여행 중에 러닝을 하려면 되도록 새벽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 시간에야만 관광객이 아닌 진짜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6시부터 관광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새벽 시간에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출근러들이다. 신기하게도 출근러들은 어디서든 티가 난다. 바르셀로나에서도,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그 어느 멋드러진 도시에서도 출근러들은 똑같은 출근러다. 그들이라고 하여 어찌 출근길의 고됨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한국의 아침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어딘가.. 절어 있다.


출근러들을 빼면 대부분이 나와 같은 러너들이다. 러너들의 국적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양인은 그나마 낫다. 중국, 일본, 대만 정도는 얼굴만 보면 국적을 추측해볼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은 아니네.' 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비동양인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국적은 추측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러너들의 얼굴만 보고는 그들이 현지인인지 아니면 나처럼 여행을 와서까지 뛰어야만 하는 독한 인간인지 추측할 수가 없다. 그저 느낄 뿐이다. '아..당신도 독한 인간이군요...'하고 말이다.


각설하고. 지금부터 여행까지 가서 굳이 러닝을 하는 이유를, 그 장점을 어필하고자 한다. 내 글을 읽고 한 명이라도 캐리어에 러닝화를 챙긴다면, (실제로 뛰러나가지 않더라도) 몹시 기쁠 것이다.


먼저, 도시를 느낄 수 있다. 1시간 정도 뛰면 대략 10km를 달릴 수 있는데, 그정도면 한 도시의 대략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랜드마크 찍고, 다음 찍고, 그다음 찍고...하는 식으로 여행할 때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몸으로 감각할 수 있다.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임수정은 말한다. "그 나라의 느낌, 공기, 냄새,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 뭐 그런 건 모르잖아요?"라고 말이다. 랜드마크만 찍는 여행을 한다면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뛰어보면 알 수 있다. 그 도시의 느낌, 공기, 냄새,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를 말이다. 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아쉽게도 뛰어본 이들만이 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족한 어휘로 살짝이라도 적어보자면 바르셀로나는 푸른 공원 같은 도시였고, 론다는 오래된 성벽 같은 도시였으며, 포르투는 따뜻한 강물 같은 도시였다.

tempImageFsk0Yb.heic 뛰다보니 익숙해진 포르투 동루이스 다리

또 다른 장점은 낯설었던 도시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러닝을 하다보면 어제 갔던 곳, 오늘 갈 곳, 그저께 묵었던 곳 등을 지나치게 된다. 웬만한 관광지들은 뭉쳐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어제까진 분명 특별해보였던 그 장소가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2번 3번만 스쳐지나가도 '드디어 에펠탑!'이 '그냥 에펠탑'이 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그냥 '대성당'이 된다. 나는 그게 좋다. 고대하고 꿈꿔왔던 에펠탑이 집 앞에 있는 교회 첨탑만큼 익숙한 것이 되어버리는 게 좋다. 온전히 다 누린 것 같아서. 다음 도시로 떠나더라도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아서. 이는 모두의 공감을 얻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마지막으로 여행 중 러닝의 최고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끝판왕은 바로 뽕이 찬다는 것이다. 맨날 가던 길이 아닌! 집 앞 산책 코스가 아닌! 낯선 장소, 이국적인 공기, 처음 보는 타지인들 사이에서 달리면! 이상하게 코에서 김이 나온다. 괜히 더 빠르게 뛰게 되고, 괜히 더 오래 뛰게 된다. 과잉 흥분 상태에 저돌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집 앞 코스에서는 5km정도만 뛰곤 하는데, 그것조차 버거워서 헥헥 댄다. 익숙한 길이라 재미도 없다. '절반쯤 왔네. 언제 끝나냐.' 하는 지루한 마음으로 뛴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다르다. 10km도 즐겁게 뛸 수 있다.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몇 키로쯤 뛰었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되고, 발길 닿는 곳으로 가다보면 재미도 있다. 실수로 길을 잃기라도 하면 의도치않게 500m는 더 뛰게 되는 건 진정한 러너라면 반가울 일(?)이다.

tempImagez1MLb3.heic 더워도 러닝! 부산 구름은 참 예쁘다.

오늘은 부산에서 글을 쓴다. 어제 막 도착한 부산역은 서울보다 후끈했고 습했다. 오늘 아침엔 온천장역 근처 하천길을 따라 러닝을 했다. 뜨거운 태양도 습한 공기도 막을 수 없는 러닝이었다.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산책을 하시는 어머니들 사이에서 5km가량을 뛰었다. 그러면서 부산을 느낄 수 있었다. 부산 특유의 바다내음, 경상도 사투리, 높은 하늘과 구름... 덕분에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부산이 조금 편해졌고, 평소였으면 뛰지 않았을 기후여도 야외 러닝을 해냈다. 이렇게 오늘도 도시 하나를 더 알아가고, 더 느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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