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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Feb 29. 2024

보미

봄에 태어난 겨울 아이

 보미는 봄에 태어나서 보미였다. 봄에 태어났지만 겨울을 닮은 아이였다. 많은 시간 날이 서 있었고 대부분 예민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아이였다. 쉽게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 웃으면 봄꽃처럼 하얗고 말간 웃음을 보여주는 아이였다. 보미가 '보미'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많진 않지만 분명 있었다. 보미가 웃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더 웃게 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다.

  

 보미를 처음 만난 건 20살 때이다. 수학 과외를 하기 위해 인천의 어느 아파트에 갔을 때 처음 봤다. 당시 보미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2번씩 만났고 같이 수학을 공부했다. 아니, 수학을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6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대체 공부는 언제 하지? 난 그래도 선생인데. 하고 생각했다.


 보미는 스스로를 '전따'라고 표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에게 공공연히 미움을 받았다고 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 아이가 조금 신기하고 많이 안쓰러웠다. "너 괜찮니?"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14살의 보미는 겨울 같았고, 괜찮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보미는 한눈에 봐도 예쁜 아이였다. 작고 하얀 얼굴에 눈, 코, 입이 오목조목 들어가 있었다. 웃지 않아도 예쁜 건 쉽지 않은데. 친구들이 보미가 예뻐서 질투하나 보다 하고 멋대로 추측했다. "그 예쁜 얼굴로 조금만 더 살갑게 친구들을 대해보면 어때?"라는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던 기억이 난다. 주제넘었나.


 보미는 외동아이였다. 언니를 갖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내가 언니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바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과외하러 와서 맨날 수다나 떨다 가는 나에게 공부와 관련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으셨다. 그것보다는 "친구관계는 어떤가요 선생님?" 하고 물어보시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보미는 신경질을 내며 방에 들어갔다. 보미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물어보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서는 내게 수학 선생님이 아니라 보미 언니를 기대하셨던 것 같다. 보미는 원치 않아 보였지만.


 보미는 당당하고 씩씩한 아이였지만 이따금 울었다. 보미를 울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왜 우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지켜봐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토닥여주는 것뿐이었다. 지금 추측해 보면 그날은 친구들과 무슨 일이 있었던 날이지 않았을까 싶다.


 눈에 띄게 날카로운 날도 있었다. 어머니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런 날에는 보미 눈치를 많이 봤다. 과외 시간이 끝나고, 어머니와 짧게 인사를 하고, 문밖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보미가 어머니께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3번의 봄을 함께 보냈다. 그 사이 보미는 조금 더 ‘보미’ 같아졌다. 그 예쁜 웃음을 조금 더 자주 보여주었다. 얼음장같이 예민하고 날카롭던 성격도 조금은 온화해졌다. 친구도 생겼다. 나 말고 또래 친구 말이다. 이따금 친구와 싸운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아무튼. 나는 그런 보미를 보며 언니 같은 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임용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과외를 그만두어야 했다. 어머니는 3년 동안 성적이 오르기는 커녕, '맨날 수다나 떨다 가는' 나에게 매달 30만 원씩이나 주셨으면서도 나를 붙잡았다. 부모의 마음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보미를 울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웃으며 헤어졌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보미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임용고시생이 되었다.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보미에게 연락이 왔다. 내게 임용고시를 합격했냐고 물었고 축하한다고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자신이 성인이 되면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다. 풉. 웃음이 나왔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후 보미와 연락이 끊겼다. 이제는 술을 마실 수 있을 텐데.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올봄에도 여지없이 겨울을 닮은 그 아이, 보미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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