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6교시는 한자시간이다. 한자 수업은 먼저 한자를 알고, 그 다음엔 6개의 한자를 120번씩 쓰는 그야말로 고문과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늘은 목요일. 다시 말해 고문시간이 있음을 확인한 13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탄식을 내뱉는다. 착하고 표현이 작은 학생은 '아.' 정도로 끝내지만, 유독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한 친구들은 '아 한문 개싫어.'와 같은 다소 괴팍한 표현까지 가버리고는 한다.
그런 13살이 마냥 미워 보이지 않는 것은 나도 그랬기 때문이겠지.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싶어서 이리저리 꼼수를 부려보지만 쓸 양이 도무지 줄지를 않았던 그때. 나도 그렇게 무작정 따라 써야 하는 한문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러나 1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다르다. 그때 그 꼬맹이는 어느 새 "왜 교육청에서 이런 걸 시키는 거예요?"라며 짜증 담긴 목소리로 묻는 13살들에게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사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롱. 후후.'라고 생각하는 앙큼한 교사가 되었다.
막상 시켜보니 알게 된 사실. 한문 시간 속 13살은 놀랍도록 조용하다. 떠들썩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우리 반이 이렇게 조용하다니. 아이들은 한자를 120번씩 베껴 쓰면서 원하든 원치않든 빠져드는 것이다. 집중력 훈련이랄까. 왜 어른들이 산만한 아이를 서예학원에 보내어 뜻도 모를 한자를 수십 번씩 적게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공부는 사실상 뒷전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씩 배우는 한자가 아이들의 기억에 얼마나 남을까? 6개 중 하나라도 기억에 남으면 선방한 것이 아닐까? 사실 그것도 욕심. 12개 중 하나만 남아도 좋다. 돌이켜보면 내 머릿속에 남은 한자는 한자를 배워온 날, 우연히 길거리나 신문에서 그 한자를 만났을 때뿐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즐거울 락'을 지겹도록 쓰고 온 날, 우연히 아빠 이름(이강락)의 락이 그 '락'자임을 알아챘을 때. 그때의 그 반가움과 기묘함이란. 즐거울 락자는 그렇게 평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오늘 배운 한자는 몇 명의 아이들에게 기묘한 반가움을 선사할 수 있을까. 나는 극히 작은 확률에 베팅하며 목요일 6교시를 마쳤다.
책이라고는 좀처럼 읽지 않던 15살, 담임 선생님은 국어선생님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40대 초반이셨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교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분이셨던 것 같다. 그때는 단지 물음표를 띄웠던 여러 가지 일들이 경력 6년 차 교사의 시각으로 보니 초보 교사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담임선생님은 독서교육에 유달리 열정을 보이셨는데 그중 가장 집중하셨던 것은 독서에 흥미를 붙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쓰셨던 여러 방법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음식 유혹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꼭 파블로프의 개가 연상이 되는데, 개나 15살이나 설탕 앞에서는 좀처럼 사족을 못 쓴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도 없을 듯하다. 선생님은 유혹의 음식으로 사탕을 선택하셨다. 10대가 좋아할 츄파츕스, 청포도, 마이쮸 같은 달콤한 사탕을 준비하셨으리라 싶겠지만,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알사탕이었다.
"선생님, 알사탕 말고 청포도 사탕 주시면 안 돼요?"라고 묻는 몇몇 용감한 친구들 덕분에 이따금 청포도 사탕을 맛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알사탕으로 회귀했다. (아마도 선생님의 취향이 200퍼센트 반영된 것이라 추측한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마다 독서를 시키셨고, 그럴 때마다 책을 읽는 우리들 사이를 돌아다니시며 책상 위에 알사탕을 올려놓으셨다. 그러면 마시멜로우를 다음 날 먹을 수 있는 몇몇 친구들은 그걸 주머니에 챙겨갔지만, 나는 단 것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쓰는 개.. 아니 아니 15살이었으므로 누가 빼앗아 갈세라 날름 입안에 넣어버리곤 했다. 그리고는 땅콩맛을 음미하며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려 먹었다. 눈으로는 글씨를 쫓고 입 속에선 사탕을 녹이는 감각적으로 아주 바쁜 20분.
알사탕만 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13년 전, 아침 독서 시간, 그리고 국어 선생님.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선생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토록 책을 좋아하는 어른이 된 것을 보면 알사탕이 꽤나 효과가 있지 않았나 싶다.
쏟아지는 비에 급히 창문을 닫아야 했던 오늘, 9월의 어느 목요일. 오늘도 13살들은 여지없이 한문을 쓴다. 그 모습이 예뻐서 서랍장 속 비타민 사탕을 꺼냈다. 비타민 사탕은 매년 대량으로 구입해 놓는 보상용 간식이다. 아이들의 원성에 못 이겨 마이쮸, abc초콜릿으로 잠시 갈아탄 적도 있으나 '이왕 주는 거 그나마 건강한 걸 주자!'는 나의 생각이 200퍼센트 반영된 간식이다. 그걸 들고 찡그린 표정의 13살들 사이로 간다. 그리고 책상 위에 살포시 비타민 사탕을 올려둔다. "쓰면서 먹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13살들은 덜그럭 덜그럭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사각사각 한자를 쓰며 감각적으로 바쁜 40분을 보낸다.
언젠가, 교묘한 우연으로, 지겹도록 썼던 한자를 마주친다면 오늘을 떠올려줄까? 비타민 사탕을 보면 '6학년 담임!'하며 떠올려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목요일 6교시 한자 시간.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짧은 나날들을 오래토록 기억해 주었으면. 오늘 퇴근길엔 마트에 들러 알사탕 하나 사야지. 책 읽으며 하나 까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