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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Oct 27. 2024

현수의 소원

(5)

엄마가 집을 나가고 9개월이 흘렀다. 현수는 그동안 엄마와 했던 것을 할매와 했다. 현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할매는 엄마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한 끼라도 굶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안달복달하는 것

하교 하자 마자 손을 씻지 않으면 병균이 손가락을 갉아먹을 것처럼 구는 것

수건을 꼭 네 번 개어서 화장실에 넣어놓는 것. 

그리고 또... 싱거운 반찬과 김치찌개의 개운함. 

할매는 아빠의 엄마인데도, 현수의 엄마와 비슷한 점이 더 많았다.


다른 점도 있었다. 현수는 그 다른 점을 좋아했다. 엄마에게 들키면 적어도 이틀은 게임을 못하게 했을 그 일을 할매는 "녀석. 잘했다."하고 넘어갔다. 아빠에게 이르지도 않았다. 아빠가 아셨다면 현수는 진작에 체크카드를 빼앗겼을 것이다. 체크카드는 현수의 보물 1호이다. 체크카드만 있으면 우영의 닌텐도도 부럽지 않았다. 한 판 하고 싶을 때마다 작고 네모난 은색을 보여주면 되었기 때문이다. 할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비밀로 해주었다. 현수가 좋아하는 그 비밀은 바로..


수학학원 빠지기다.


수학학원은 입장할 때마다 엄마한테 도착 알림 문자를 보냈다. 그것 때문에 현수는 학원을 빠질 수가 없었다. 우영이가 닌텐도 게임 10판을 시켜주겠다고 꼬드긴 날, 학원에 가지 않았다가 30분도 채 안 되어 키즈폰으로 전화가 왔다. 그날 들은 엄마의 화난 목소리와 이틀 동안 금지 당했던 게임, 그리고 아빠에게 빼앗긴 체크카드의 트라우마는 두고두고 우영의 유혹을 떨쳐내게 만들었다. 


그러나 할매가 오고 나서는 달랐다. 할매 전화번호는 수학학원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매는 현수가 학원을 빠지든 빠지지 않든 따뜻한 율무차를 끓여주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현수는 오히려 할매에게 모든 걸 말할 수 있었다. 오늘 학원에 빠진 일, 담임 선생님께 혼난 일, 우영에게 잘못한 일, 정하율에게 사탕을 건넨 일 등등. 할매는 현수가 무슨 말을 하든 현수편이었다.


현수는 오늘도 수학학원을 빠졌다. 엄마가 가고 난 후로 벌써 세 번째다. 학원을 빠지는 것은 몇 번을 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현수는 우영의 닌텐도 + 떡볶이 유혹에 넘어가 우영의 집에 오긴 했지만, 급히 먹은 쑥개떡이 가슴에 걸리기라도 한 듯 불편한 마음을 씻을 수 없었다. 현수는 자꾸만 시계를 확인했다. 우영의 집은 낡은 벽지가 너덜너덜 했고, 벽에 걸린 그보다 더 낡은 시계는 초바늘이 너덜너덜 원을 그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3시 30분. 학원에 가야할 시간이 벌써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현수는 키즈폰을 확인했다. 혹시나 엄마로부터 전화가 와있지는 않을까. 기다렸다. 우영이가 "네 차례"라며 닌텐도를 내밀어도 "잠시만."이라고 답하며 마다했다. 분명 도착 알림 문자가 안 갔을 텐데. 엄마는 학원에 안 간 것을 알고 있을텐데.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



현수와 엄마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났다. 지금까지 8번 만났다. 이번 달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엄마는 전화로 월말에 월급이 들어온다며, 몇 밤만 더 자고 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급이 들어와야 현수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멋있는 옷을 사줄 수 있다고도 말했다. 


엄마 말은 진짜였다. 엄마는 현수와 만나는 날이면 현수가 좋아하는 햄버거, 피자, 치킨을 사주었다. 현수는 그보다 <김김계 세트>가 더 좋았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엄마가 슬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비싼 음식만 사주는 것이 아니었다. 현수와 작별 인사를 나눌 때마다 엄마는 현수의 손에 한가득 백화점 쇼핑백을 쥐어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각종 문제집과 장난감, 간식, 옷, 그리고 할매가 쓰는 화장품과 영양제가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엄마와 보내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체육시간이나 점심시간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게임 한 판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엄마와 헤어질 때면 아빠가 데리러 왔다. 아빠와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보는 사이인데도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쩌면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것 같았다. 


왔어? 

어. 

갈게. 

응. 


그게 다였다. 현수는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했던 사이인 것이 맞는지. 어떻게 하면 둘이 화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학교폭력 선생님이 '나전달법'이라고 하는 화해법을 알려주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다음 달이 오기 전에 아빠에게 나전달법을 알려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처음부터 안 좋았던 것은 아니다. 둘은 여느 부부가 그러하듯 투닥투닥 싸웠지만 쉬이 털어내는 사이였다. 현수가 7살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둘의 가장 행복한 모습은 동물원에 갔을 때이다. 


현수가 유치원 졸업선물로 받아온 동물 수첩에는 각종 동물들에 대한 정보와 사진이 빼곡했다. 현수는 여느 7살 남자아이가 그러하듯, 동물과 곤충, 공룡을 사랑했고 그런 현수에게 동물 수첩은 웬만한 사탕보다 소중한 물건이었다. 현수는 동물 수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놀이터도 마다할 정도였다. 급기야 엄마아빠는 날이 아직 풀리기도 전인 2월 중순, 현수를 동물원에 데려다 놓았다. 


그날은 유독 추웠다. 동물원 곳곳에는 며칠 전에 내린 탓에 미처 치우지 못한 눈더미가 부분부분 새카맣게 변한 채로 쌓여 있었다. 야외에 나와있었을 동물들도 추운 날씨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따뜻한 실내에서 몸을 웅크리고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고 있겠지.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기껏 마음 먹고 온 동물원에서 제대로 구경도 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의 체온을 공유했다. 딱 붙어서. 하하호호 웃으며. 그순간, 그공간에서만큼은 현수가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부부인 것처럼 서로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7살, 아직 그런 기류를 알아보기 힘든 현수의 눈에도 둘은 사이가 좋아보였다. 엄마 아빠가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새하얀 입김이 둘의 얼굴을 덥게 만드는 것 같았다.


현수는 오랜만에 기도를 했다. 평소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믿지 않는 현수는 기도를 잘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빌었던 것들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맨날 어깨죽지를 때리는 조폭마누라 이윤진이 전학가게 해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이윤진은 전학을 가지 않았다. 우영의 닌텐도와 똑같은 것을 갖게 해달라고 빌어도 아빠는 닌텐도를 사주지 않았다. 정하율과 짝꿍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도, 짝꿍은 커녕 같은 모둠도 되지 않았다. 현수에게 기도는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기도했다. 신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것만큼은 꼭 이루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읊조렸다.


"수학학원을 빠지고, 엄마 아빠와 동물원 가게 해주세요."


현수 가족에게 생긴 변화는 10살짜리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



아빠의 표정이 좋지 않다. 할매의 표정도 좋지 않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현수는 집 안에 켜켜이 쌓인 불행의 기운을 감지했다. 엄마는 이럴 때면 꼭 '현수는 방에 들어가 있어.'라고 말했다. 어른들끼리 하는 얘기라고. 너는 알면 안 되는 얘기라고. 그럴 때마다 현수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텐데 왜 듣지도 못하게 하는지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현수는 아빠와 할매가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하기도 전에 알아서 방에 들어갔다.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을까봐 두려웠던 것도 같다.


"대체 언제부터에요? 그러게 병원 가보라고 했잖아."

아빠는 화가 난 걸까?

"씁. 작게 말해라. 현수 들리겠다."

할매는 뭔가 잘못하기라도 한 듯 속삭였다.


현수는 아까부터 방에 앉아 거실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가, 정하율 생각을 하다가, 우영이와 쉬는 시간에 했던 포켓몬 카드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하려해도 오늘따라 속닥이듯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귀에 콕콕 박혔다.


"이럴 게 아니라 현수엄마한테 말을 해야"

"안된다."

아빠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할매가 말했다. 할매는 본래 말 수가 적었다. 현수가 무슨 말을 해도 "그랬어?" "괜찮아?" "괜찮아."라고 답했다. 3음절이 넘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의 말을 끊는 것은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그런 할매가 아빠의 말을 끊었다. 


"예? 아니 엄마. 이런 일은 현수 엄마도 알아야죠." 

"말해봤자 긁어부스럼이야. 내 병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란다."

"엄마가 현수엄마한테 어떻게 했는데요. 그사람도 알 건 알아야지."


그사람? 현수는 놀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아빠의 말을 따라했다. 

그사람. 아빠는 분명 그사람이라고 했다. 그사람이 누구인지 헤아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사람은 엄마였다. "현수엄마", "너", "야"까지는 들어봤어도 그사람은 처음이었다. 현수는 오랜만에 콧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아빠에게 엄마는 이제 그사람이 된 것일까. 정말 둘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학교폭력 선생님이 사람 관계는 언제는 다시 좋아질 수 있는 거라고 하셨는데. 현수는 콧물을 뒤쫓듯 터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그 다음에 아빠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큰 병에 걸렸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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