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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Oct 27. 2024

마음 감기

(7)

현수는 눈이 잔뜩 부어 잘 떠지지도 않는 상태로 현관을 나섰다. 현수의 10년 인생에 있어 어제 일은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큰 쓰나미였다. 할매가 많이 아프다는 것. 그리고 엄마가 9개월 만에 집에 왔지만 몇 시간만에 다시 떠난 것은 현수로 하여금 콧물과 눈물을 억수로 내리는 비처럼 쏟아내게 했다. 


학교 가는 길, 현수는 아침부터 멍-했다. 하늘에선 그런 현수의 정신을 말끔히 씻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그 어떤 것도 현수의 기분을 맑게 할 수 없었다. 우중충한 기분으로 우중충한 우산을 들고 우중충한 거리를 걷고 있자니 왠지 또 슬퍼졌다. 어제의 장면이 또다시 떠올라서다. 한참 비참해지려던 그때 누군가 현수를 불렀다.


"야! 강현수!"

현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우영이 서 있었다. 노란색 우산을 들고.

"아 우영. 안녕."

"뭐야. 현수 너 얼굴이 왜이래?"

"응? 그냥."

"지금 기분 안 좋구나! 왜!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런 거 없어. 얼른 가자."

현수는 우영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영에게만큼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우영은 엄마랑 둘이 산다. 우영이가 6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우영은 이제 너무 오래돼서 아빠 얼굴도 잘 기억 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현수는 안다.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우영이 움찔움찔한다는 것을. 우영의 사정을 모르는 친구가 우영에게 아빠 이야기를 물어보면 우영이 어물쩡 다른 말로 넘겨버린다는 것을. 그런 우영에게 엄마아빠 이야기를 하며 위로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도 이전에 우영이네 집 사정을 알고 한 마디 한 적이 있다. 현수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다.  

"현수야, 우영이한테 아빠 이야기 하지마."

"응? 왜요?"

"그러면 우영이가 아플지도 모르거든."

"아빠 얘기를 하면 우영이가 아파? 왜? 어디가 아파?"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우리 현수 감기 걸리면 어떻지?"

"콜록해. 머리도 뜨겁고. 놀이터도 못 나가."

"그렇지! 우영이한테는 아빠 이야기가 감기야. 아빠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콜록해. 머리도 뜨겁고, 놀이터도 나가기 싫어질지도 몰라."

"정말? 아빠 이야기가?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빠 이야기는 재밌고 웃긴데!"

"현수가 지금 당장 이해하긴 힘들거야. 흠. 그러면 이것만 기억해. 사람마다 걸리는 마음의 감기가 다르다는 것. 우영이한테는 아빠 이야기가 마음 감기라는 것. 알겠지 우리 아들?"


현수는 그때 이후로 우영 앞에서 최대한 아빠 이야기를 자제했다. 그건 배려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현수는 자신의 슬픔보다 우영의 마음 감기를 걱정했다. 


현수는 하루종일 힘이 없었다. 수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정하율이 웬일인지 와서 샤프심이 있냐고 물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러 나갈 힘도 없었다. 우영의 칭얼댐에 못 이겨 따라 나가긴 했지만 공을 쫓아가는 다리가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하교길, 우영이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다그치며 물었다.

"야 강현수. 너 무슨 일 있지. 왜 나한테 말 안 해?"

"그런 거 아니야.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와. 진짜 이러기야? 오늘 너 닌텐도 안 시켜줄거야."

"오늘은 닌텐도 하러 못 가."

"와. 강현수!"

"..."


대답 없는 현수를 향해 우영은 무언가 결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일이지?"

현수는 귀청 떨어지는 목소리 때문인지, 우영이 내뱉은 의외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어안이 벙벙했다. 


더이상은 숨길 수 없겠다. 아니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의 마음 감기를 걱정하기에 현수에게 닥친 불행은 너무 크고 현수는 너무 작았다.


"응. 사실은 아빠 엄마가..그리고 할매가.." 

현수는 눈물을 쏟아냈다. 길 한복판에서. 우영은 그런 현수를 끌고 놀이터 옆 나무 정자로 갔다. 현수는 정자에 앉아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상태로 어제 일을 털어놓았다. 우영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쯤이면 위로를 해줘야 하는데. 위로까진 아니더라도 무언가 말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은 마음에 눈물 콧물이 쏙 들어간 현수는 멀뚱히 우영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현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우영은 한참을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다 작게 말했다. 


"현수야."

"어."

"솔직히 난 네가 부러워."

"어?"

"그렇게 맨날 싸우는 엄마 아빠가 있다는 게. 난 너무 부러워."


현수는 화가 났다. 친구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부럽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넌 복 받은 사람이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현수 너는 복이 많다고. 복이 많아서 너희 할매랑 희영이 이모랑 사이가 좋은 거라고."

"내가 복이 많다고?"

"됐어. 나 먼저 간다."

"..."

"내일 봐."

현수는 가방을 어깨에 걸터메는 우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붙잡을 수도 없었다. 


내가 복이 많다니. 우영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한참을 혼란스러워하던 현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우영은 지금 마음 감기에 걸린 거다. 내가 아빠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콜록. 온 몸이 뜨겁고 나랑 닌텐도를 하기 싫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나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할매가 아프고, 엄마아빠가 이혼할 지도 모르는데 내가 부러울 리 없다. 


역시 우영에게 아빠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분명 엄마가 말했는데. 


현수는 쫓아가서 우영을 붙잡고 화라도 내야할지. 아니면 아빠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할지 고민하다 결국 가방을 메고 집으로 향했다. 우영이 사는 709동도 무력히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



할매는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졌다. 십 분에 한 번씩 하던 격한 기침은 이제 숨을 세 번 들이쉴 때마다 나왔다. 할매의 기침이 심해질수록 현수 마음에도 멍이 하나씩 늘어갔다. 아마 아빠의 마음에는 더 큰 멍이 늘어가고 있을 것이다. 기침뿐만이 아니었다. 할매는 살도 많이 빠졌다. 그런데도 병원에 입원하기 싫어했다. 할매는 지금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회사에 연차를 냈다. 할머니를 설득해 병원에 입원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됐다. 쓸데 없이 입원해서 환자 취급 받을 생각 없다."

"엄마. 지금 환자 취급이고 뭐고 당장 입원해야 한다니까요!"

"..."

"지금 입원 안 하면 더 안 좋아진다구요! 현수랑 나 봐서라도 입원해요. 네?"

"..."

할매는 묵묵부답이었다. 아빠는 그럴 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할매의 고집을 꺾으려고 애쓰는 아빠가 안쓰러웠다.

"내가 입원하면. 현수는."

"엄마. 나도 어른이에요. 현수 하나는 잘 챙길 수 있다구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수는 자신이 나설 차례라고 생각했다.

"할매애애."

최대한 애교를 섞어 말했다. 

할매에게 먹힐까?

"내가 맨날 놀러 갈게요. 할매 좋아하는 율무차도 타줄게요. 응?" 

할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현수의 애교에 "우리 낑깡이" 하며 답하지 않는 할매의 모습이 어색했다. 현수는 난감했다. 

차라리 울며불며 떼를 썼어야 했나? 

그러던 찰나 할매가 말했다.


"희영이랑 화해해라."

할매가 입술을 곧게 펴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했다. 저건 할매가 잘 짓지 않는 표정이다. 인색하고 고집있는 표정. 그건 마치 어떠한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보였다. 

"예?"

아빠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러면 입원할게."

"엄마 그건 말이 안 되잖.."

"희영이만한 애 없다."

 "엄마!!"

현수는 둘 사이의 놓인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서 얼핏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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