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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할매는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였지만 단지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었다. 둘은 각별했다. 15년 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생과 사가 너무나도 쉬웠던 그 공간에서 엄마는 간호사였고 할매는 수간호사였다. 둘은 숱하게 많은 죽음을 함께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죽음을 지켜냈다.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이었던 엄마에게 할매는 담당 교수보다 더 믿음직한 선배이자, 멘토이자, 전우였고 할매 역시 그런 엄마를 아꼈다.
"희영아"
할매는 엄마 아빠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엄마를 희영이라고 불렀다. 아빠가 아무리 "이젠 며느리라고 부르셔야죠."라고 할매를 다그쳐도 할매는 희영이라고 부르기를 고집했다. 시집을 간다고 해서 이름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이름이 지워지면 그 사람도 지워지는 것 같아서 싫다고. 할매는 엄마가 영원히 청춘의 꽃 같은 "희영이"로 남길 바랐다. 아빠와 현수로 인해 "희영이"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희영아. 이번에 담근 김치인데 필요하면 집에 좀 갖다 줄까?"
할매는 김치를 잘 담갔다. 할매가 젊었을 땐 김장날 꼭 며느리가 불려 갔고, 그래서 할매는 원하든 원치 않든 김치를 잘 담그게 되었다. 하지만 할매는 단 한 번도 김장날 엄마를 부르지 않았다. 항상 김치를 가져다주었다. "너는 나처럼 고생하면 안 된다."라고 버릇처럼 말했다. 할매는 엄마가 없는 희영이를 지켜주고 싶어 했다.
"어머니, 매번 얻어먹기만 해서 어떡해요. 제가 현수아빠한테 더 잘할게요."
엄마는 현수와 아빠가 할머니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매번 죄송해했다. 그리고 꼭 아빠한테 더 잘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엄마에게는 그게 할매에 대한 보답이었던 걸까?
"어머니, 이거 간 좀 봐주세요. 아유 어떻게 해도 어머니 솜씨를 따라잡을 수가 없네요."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넉살을 부리곤 했다. 현수는 그럴 때마다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야간 근무를 많이 해서 대부분의 날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날이 서있었다. 특히 아빠에게는 아주 예민했다. 그런 엄마가 할매에게는 마치 봄볕에 녹아내리는 2월 말의 눈송이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한 명 더 있다. 현수. 엄마는 어울리지도 않는 콧소리를 잔뜩 넣어 할매와 현수를 칭찬하곤 했다.
...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현수엄마랑 당장 화해를 어떻게 해요."
아빠는 얼굴이 울퉁불퉁, 울그락불그락한 채로 말했다.
"무조건 싹싹 빌어라. 희영이는 용서해 줄 애다."
할매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시선을 피하면 완고함을 보일 수 있다는 듯.
"하... 9개월이나 기다렸어요. 이제 현수엄마도 정신 차려야죠. 그리고 화해하는 거 기다리다가 엄마 쓰러지겠어요. 일단 내일 입원부터 해요. 네?"
"화해하고 와. 그럼 시키지 않아도 두 발로 직접 갈 테니까."
"어머니 정말..!"
현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할매 말대로 엄마가 정말 용서해줄까? 아니 그것보다 아빠가 엄마에게 싹싹 빌 수 있는 사람일까?
아빠를 40년 보고, 엄마를 15년 본 할매는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다음 날, 아빠는 곧장 엄마를 찾았다. H 대학병원 앞 작은 원룸이었다. 야간 근무를 하는 엄마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11시부터 3시까지였다. 덕분에 현수는 학교도 빠지고 아빠에게 끌려갔다. 현수가 숨겨진 플랜 B라나 뭐라나.
쿵쿵쿵
아빠는 현관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현수는 새삼 아빠는 엄마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만 몰랐던 거야? 허무했다.
"현수 엄마. 나야. 문 열어."
"누구..? 현수 아빠?"
엄마는 자다 깼는지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현수랑 같이 왔어. 문 좀 열어봐."
끼익
열린 문 틈으로 부스스한 머리칼과,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바지, 눈곱과 베갯자국이 선명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자다 깬 것 같다는 추측을 묻지 않아도 확인시켜 주는 차림새였다. 현수는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을 밤처럼 동그랗게 부어있는 엄마의 커다란 눈. 현수는 그런 엄마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엄마도 나만큼 울었을까? 내가 없어서 슬펐을까? 내가 보고싶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이시간에 전화도 없이 어쩐 일이야."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 마무리해야지."
"..."
엄마는 또 대답이 없었다. 아빠는 작정했다는 듯, 그런 엄마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화내지 말자, 재촉하지 말자." 성격 급한 아빠가 아침에 거울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읊조렸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정적. 현관문 앞에 선 세 사람의 그림자가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참지 못하고 정적을 깨뜨린 사람은 아빠였다.
"하. 현수 엄마. 좀 제발.."
"어머니는 내가 책임 지고 간병할 거야. 현수도 휴직 처리 되면 데리고 갈 거고. 그때까지만.."
"정말 이혼할 거야?"
아빠는 화를 내지 않았다. 원래 저 말을 할 땐 항상 화를 내며 말하고는 했는데. 오늘은 힘이 빠져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말한 것도 같았다. 아빠도 지친 걸까.
"..."
엄마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늘어난 회색 츄리닝 바지 끝의 올이 나간 부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병원에 안 가시겠대. 당신이랑 화해 안 하면."
"뭐?"
그 말에 엄마는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고 토끼눈으로 아빠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야. 당신이랑 화해하고 오래. 그러면 입원하시겠다고."
"하.. 어머니 정말.."
"알잖아 우리 엄마. 괜찮은 것 밖에 없는 사람인 거."
"알지. 너무 잘 알지. 어머니가 싫은 소리 하시는 거 들어본 적 없어."
"그런 엄마가 안 괜찮대. 우리가 싸우는 거. 그건 절대 안 괜찮대."
"..."
"현수엄마. 이제 그만하고 들어오면 안 될까."
"..."
"이러다 엄마 쓰러져. 그걸 바라는 거야?"
"생각이 좀 필요해."
"그놈의 생각! 생각! 생각! 대체 뭘 얼마나 더 생각해야 하는 건데? 우리 생각은 안 해? 현수는? 당신한테 필요하다는 그 생각에 우리는 없는 거냐고!"
"화낼 거면 가."
엄마도 진절 머리가 나는 표정이었다.
현수는 또다시 콧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엄마아빠의 다툼이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현수의 콧물은 그럴 때마다 빠짐없이 반응했다. 현수는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엄마아빠가 싸울 땐 방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베개로 귀를 막을 수라도 있었는데.
엄마는 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빠에게 눈짓을 보냈다. 애 듣고 있는데 계속할 거야? 하는 표정. 아빠는 그 표정을 읽었는지 왼팔로 현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게 플랜비인가.
현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조마조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듣고 있다간 철봉에 3분 이상 매달렸을 때처럼 철퍼덕하고 눈물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할매가 보고 싶다. 할매. 할매가 왔으면 좋겠다.
"그럼."
아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해."
엄마는 눈빛으로 물음표를 만들었다. 현수도 아빠의 왼쪽 팔에 감싸인 자신의 어깨를 살짝 떼어내며 아빠를 올려보았다.
"화해한 척이라도 해."
"뭐?"
"일단 엄마부터 살려야 하니까... 화해한 척하자고. 이혼 얘기는 없었던 일인 척, 그렇게 연기하자고."
"그게 말이 돼?"
엄마와 현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소리 내어 묻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둘은 그 말을 텔레파시처럼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