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오늘도 할매는 간을 반쯤 하다 말은 것 같은 반찬들을 잔뜩 내놓았다. 오징어 젓갈, 오이소박이, 연근볶음..모두 어딘가 심심하고 밍밍했다. 아빠는 할매가 아프시니까, 현수가 할매를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우리 아들, 밥솥에 있는 밥 좀 퍼서 식탁에 올려놔줄래?"
현수는 방에 틀어박혀 포켓몬 카드를 구경하고 있다 아빠의 말에 못이겨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한테 하는 것만큼만 엄마한테 친절하게 말하지. 하지만 생각만 할 뿐 결코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말이었다.
"네."
"현수야. 손 씻고 해. 큼. 흠."
할매가 국을 뜨며 말했다.
"응 할매."
현수는 들었던 주걱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엄마도, 할머니도 손 씻는 것 만큼은 꼭 잔소리를 하고 만다. 아 또 엄마 생각. 현수는 엄마를 보려면 몇 밤이나 더 자야할지 생각하며 비누칠을 하고 물을 헹구어냈다. 세 밤. 아직도 세 밤이나 남았다.
현수는 밥을 펐다. 할매는 조금, 아빠는 많이. 그리고 현수 것까지 푸려고 하는 찰나 아빠가 말했다.
"현수야. 오늘은 밥 하나 더 퍼."
"응? 하나 더?"
"어. 네 그릇 푸면 돼."
"왜?"
띵동-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초인종 소리가 울리는 것은 배달음식 말고는 없는데.
띵동-
삑삑삑삑
덜컥.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울리더니 밖에 있는 사람이 현관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열었다. 초인종 소리는 지금 들어가니 놀라지 말라고 알리는 신호였던 것이다.
현수는 토끼눈을 하고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사람을 알아본 순간 현수는 치와와의 동그란 눈처럼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현수가 날마다 그려왔던 순간.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장면.
머쓱한 표정으로 현관을 지나 복도를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엄마였다.
현수는 왈칵 눈물이 고였다. 엄마다. 드디어 엄마가 왔다. 세 밤이나 더 자야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백화점이나 레스토랑, 롤러스케이트장이 아니라 우리집에서 엄마를 보다니. 현수는 서둘러 달려가서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는 그런 현수를 완벽하게 받아 안았다. 꽉 끌어안았다. 둘 사이엔 작은 틈도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화장품 냄새. 그 포송한 머스크 향. 현수는 그 냄새를 맡자마자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아 몸집을 불려갔던 원망의 감정이 씻겨 내려감을 느꼈다.
"왔어?"
아빠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희영아. 잘왔다."
아빠의 어조에 반항하기라도 하듯 할매는 따뜻한 어조로 물었다. 말로 엄마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다 알고 있었구나.
현수는 생각했다. 엄마는 깜짝 손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한테만 말하지 않은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현수는 잠시 동안 아빠와 할매를 째려보았다.
"들어와서 저녁 들어라. 크흠. 배고프겠다."
할머니가 엄마를 부엌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네 어머니."
엄마는 잠깐 눈가가 붉어지는 것 같더니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식탁에 앉았다. 얼마만에 넷이서 모인 자리일까. 아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할매는 늘 그랬듯 말수가 적었다. 엄마는 현수를 한 번 보고 다시 할매를 한 번 보고 밥을 먹었다. 아빠에게 얼핏 시선을 보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너무 짧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못 본 새 야위었네."
정적을 깬 것은 할매였다.
"아. 잘 챙겨 먹었는데...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엄마는 다시 눈가가 붉어지더니 어느 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달랑달랑 떨어질 듯 말듯. 엄마의 눈물은 바람 부는 날 빨래줄에 매달린 옷처럼 간신히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괜찮아."
나왔다. 할매의 유행어. 할매는 뭐만하면 괜찮다고 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는 이제 할매의 괜찮아를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에서는 뭐라고..아니 이따가 얘기할까요?"
엄마도 할매의 괜찮아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를 괜찮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할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현수는 곧 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빠와 엄마와 할매는 한참이나 이야기를 했다. 주로 아빠가 말했다. 할매는 옆에서 아빠의 말에 "그 정도는 아니네."라고 말하거나 "걱정할 거 없다."고 말하는 정도였다.
엄마는.. 울었다. 엄마는 원래도 잘 울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울면 백발백중으로 따라 울었고, 친한 친구인 규희 이모와 통화하면서도 자주 울었다. 그리고 아빠와 싸울 때도.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오늘은 터져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아보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것 같은 울음이었다.
"끅. 끄끅."
엄마의 울음 소리는 아빠의 말 허리를 끊으며 구슬프게도 들렸다. 한참동안이나 같은 소리만 내던 엄마는 아빠의 말이 끝나자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냈다. 그리고 잠시 진정한 후에 말했다.
"어떡해요. 어..어.. 어머니... 흐끅. 어..어..어떡해요. 어머니..."
그런 엄마를 다독이는 것은 할매였다. 할매는 엄마를 끌어안으며 자꾸만 괜찮다고 말했다. 현수는 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렸다.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아닌가? 할매인건가?
현수는 이해되지 않지만 슬픔과 불행이 가득 끼여 있는 분위기만은 감지할 수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빠가 둘 사이를 갈라놓으며 말했다.
"어쨌든 당신도 알아야할 것 같아서 불렀어."
"흐끅. 끅. 응. 내가 알아야지. 고마워."
"이제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나머지는 현수엄마랑 같이 정리할게요."
"그래요 어머니. 들어가서 쉬세요. 저는 현수아빠랑 이야기 좀만 더 하고 늦지 않게 갈게요."
엄마아빠의 말에 할매는 힘이 다 빠졌는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희영이는 조심히 가라."
"네 어머니. 현수 봐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어머니께 신세만 지고...흐끅."
엄마는 겨우 진정된 감정이 다시금 차오르는 것 같았다.
"당신 이제 그만해. 엄마 얼른 들어가셔요. 현수엄마 또 울겠다."
잠시후 할매가 방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현수는 엄마아빠가 남아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했다. 하지만 귀를 아무리 기울여도 엄마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의 정적. 현수는 혹시 엄마아빠가 소곤소곤 말해서 안 들리는 건가 싶어 방문을 살짝 열어보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던 찰나.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떡할거야."
"...뭘"
"엄마도 아프신데 현수는 누가 챙겨?"
"생각해볼게."
"그놈의 생각해본다는 말 좀 그만하면 안돼? 지금이 벌써 몇 개월째인 줄 알기나 해?"
아빠는 언성을 높였다.
"소리지르지 마. 그리고 재촉하지 마. 당신이 재촉할 수록 난 더 힘들어질 뿐이야. 알잖아."
"그래. 내가 당신 잘 알지. 사람 복장 터지게 하려고 작정하면 한도 끝도 없이 사악해지는 거."
"사악?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잖아. 난 그런 사람이라고. 그게 사악한 거야? 내가 당신 복장 터지게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아?"
"기다리는데도 정도가 있지. 벌써 9개월이야. 나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 내 성격 급한 거 몰라?"
"알지. 당신 성격 급한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도 다 생각하고 있다고. 정리가 좀 필요할 뿐이야."
"그러니까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거냐고! 이혼을 할 거면 하든지. 합칠 거면 다시 합치든지. 이게 뭐야. 현수 생각은 안 해?"
"내가 현수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 누구는 뭐 이혼 안 하고 싶은줄 아냐고!"
급기야 엄마도 흥분하기 시작했다. 현수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발작난 것처럼 분노 게이지를 급격히 쌓아올렸다. 현수는 또다시 나온 이혼 이야기에 마음이 울렁울렁 너울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폭풍우가 들이닥치기 직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떡하지. 다시 귀를 막아야 하나. 아니다. 지금 듣지 않으면 또 언제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현수는 용기내어 끝까지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까 말해보라고.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하. 당신이 이렇게 몰아붙이면 내 대답은 하나뿐이야."
"당신 정말! 엄마도 아프신데 정말 이럴거야? 엄마가 당신한테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현수는 아빠의 화난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할매가 아프다고? 그럼 9개월만에 엄마가 온 것도, 와서 한 시간 가까이 울기만 한 것도, 할매가 괜찮다고 엄마를 위로했던 것도 다 할매가 아파서 그런 거였어?
현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매는 건강해보였는데. 매일 맛있는 간식을 해주고, 현수의 놀래키기 장난에 어깨를 들썩이고, 낑깡이라고 부르며 안아주고...모든 게 다 평소같았는데.. 그러다 가끔 기침을 했지만. 할매의 괜찮아는 정말 괜찮아가 아니었던 걸까.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한테 너무 잘해주셨지. 어머니 덕분에 당신이랑 이만큼이나 살았으니까. 나 그래서 꼭 은혜 갚을 거야. 어떻게든 보답할 거야."
"이게 지금 보답하는 거야? 배신하는 거 아니고?"
"당신. 말 함부로 하지마."
"상황이 그렇잖아!"
"작게 좀 말해. 어머니 들으시겠어. 간병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책임질테니까 걱정 마."
"책임? 당신이 책임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어? 현수는? 나는? 우리는? 책임지려고 노력이나 한 적 있냐고."
"하. 당신이랑은 도저히 대화가 안 된다. 나 그만 갈게. 현수랑 어머니 보러 다시 올 거야. 연락할게."
"그래 가라 가. 또 그렇게 가버리라고!"
안돼. 엄마를 보내면 안 된다. 몇 시간 있지도 않았는데.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현수는 엄마에게 가버리라고 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아빠는 왜 화를 낼까. 왜 엄마에게 나쁘게 말할까.
그리고 정말로 터벅 터벅 걸어 문을 열고 나가는 엄마가 미웠다.
왜 엄마는 항상 나를 두고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