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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Oct 27. 2024

할매의 기침소리

(4)

현수의 새파란 목소리에 할매는 깜짝 놀란듯 뒤를 돌아보았다. 할매는 늘 깜짝 깜짝 놀란다. 놀랄 때는 항상 어깨를 위아래로 들썩인다. 그러면 현수는 할매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현수는 그럴 때마다 짙게 나는 할매의 향기를 킁킁 하며 맡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현수는 할매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꽉 끌어안았다.

왜 이제야 왔어 할매.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알아?

현수는 하고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매의 허리를 세게 조이는 것으로 그 모든 말을 대신했다.


할매를 깜짝 놀래킬 때마다 아빠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할매는 연세가 많아서 심장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했다. 할매의 건강을 위해서라고, 아무리 할매가 좋아도 참으라고 했다. 그러면 할매는 아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중에 현수에게 살짝 와서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할매는 우리 낑깡이가 깜짝 놀래켜도 괜찮아. 우리 낑깡이는 뭐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현수는 할매의 입김에 귀가 간질간질 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할매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할매의 향기가 너무 진하게 나니까. 그러면 그럴 수록 현수의 마음은 편해지니까. 그러면 현수는 쪼르르 아빠에게 달려가 할매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할매가 괜찮다고 했거든? 아빠는 메롱이야. 흥!"

그러면 아빠는 할매에게 소리쳤다.

"엄마! 애 버릇 나빠져요! 안되는 건 안 된다고 알려줘야지!!"

다그치듯 말하는 아빠에게 할매는 약오르지? 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너도 다 그렇게 컸다."

그러면 현수는 아빠에게 한 번 더 혀를 날름해보였다. 그리고는 꺄르르 웃으며 할매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할매! 언제 왔어?"

허리춤을 감싸안았던 팔을 풀고 할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방금. 우리 낑깡이 마중 나오려고 요리하다가 나왔어. 어서 올라가자."

사근사근 불어오는 가을 바람이 할매의 옆 머리칼을 날리게 했다. 현수는 할매의 흰 머리카락을 눈으로 쫓으며 아파트 계단을 올랐다. 

이제 됐다. 할매가 왔으니 엄마도 올 것이다.


"할매. 엄마랑 아빠가..."

계단을 오르며 현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일러바쳤다. 할매는 현수의 말을 듣고만 있다 말 없이 인중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콧물을 닦아주었다. 조금도 더럽지 않다는 듯. 마치 여러 번 정수된 깨끗한 물이라도 되는 듯.


현수는 할매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나서야 마음이 개운해졌다. 할매는 현수의 등을 토닥이다 콧물을 닦아주다 다시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현수의 눈물이 어느정도 그치자 부엌에서 따뜻한 율무차를 내어주었다. 

"마셔봐. 기분이 좋아져."

현수는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코코아나 뭉그덩 알갱이가 씹히는 알로에 주스가 좋았지만 잠자코 마셨다. 할매가 권하는 걸 거부하는 것은 현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할매는 현수에게 한 번도 이상한 맛을 권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율무차의 뜨거움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자 현수는 배가 고파옴을 느꼈다. 너무 많이 울어버린 탓이다. 가을 햇볕은 어느새 산등성이를 너머 새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할매. 나 배고파."

"그럴 줄 알고 할매가 김치찌개 끓여놨어."

"정말? 김김계 세트도?"

"아유 그럼. 김이랑 계란말이도 해줄게."

"와 할매 최고!!"

현수는 4시간 전에 먹은 김치찌개는 김치찌개가 아니었다는 듯, 컵밥을 먹었던 지난 며칠을 보상이라도 받듯, 재롱을 부리듯, 맛있게 먹으며 할매를 즐겁게 했다. 


현수는 마음 속에 쌓인 슬픔을 털어냈고, 울었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느라 할매가 줄곧 내뱉는 기침소리를 듣지 못했다. 


콜록 콜록. 

켁켁.

그러다 다시 콜록.  



...



할매의 기침소리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뭐든 재빠르게 눈치 채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퇴근해서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을 때까지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옷을 걸어두고, 아저씨 냄새가 나는 스킨을 바르고, 런닝구를 입고... 그 모든 것에 15분 이상 할애하지 않는 것이다. 아빠는 밥도 빨리 먹었다. 누가 훔쳐먹기라도 하는 듯, 와구와구 집어 먹었다. 아빠가 7남매의 막내이던 시절 조금만 깨작대며 먹으면 형들이 "막내 안 먹는다"라고 말하며 맛있는 햄이나 계란후라이를 훔쳐 먹은 게 한이 되어 빨리 먹는 습관이 생겼다고 했다. 


아빠는 그날도 할머니의 김김계세트를 마시듯 먹었다. 할머니는 저녁 뉴스가 켜진 티비 앞 바닥에 앉아 밀린 빨래를 개었다. 급히 음식물을 밀어넣던 아빠는 문득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빼꼼 뒤로 돌려 할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왜 기침을 해?"

할매는 티비를 보다, 빨래를 개다, 다시 티비를 보며 답했다. 무심한 시선으로.

"별 거 아니다. 요며칠 감기 기운이 있었어."

"누가 감기 걸렸다고 기침을 그렇게 해요. 병원 가보셨어요?"

"별스럽게 병원은 무슨. 우리 나이 되면 골골대는게 정상이지 뭐. 괜찮다."

"엄마가 무슨 나이가 많다고 그래.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들 연세 많이 드셔도 얼마나 정정한지 아셔요?"

"율무차 좀 마시면 나아질 거야. 유난 떨지 마라. 콜록 콜록"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는 기다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기침을 했다. 아빠가 그런 할머니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병원 예약할게요."

"거참. 됐대도."

현수는 할매 옆에 앉아 동그랗게 차오른 보라색 거봉을 먹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할매여도 아빠 고집은 못 꺾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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