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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야?"
현수는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현수는 티나지 않게 코를 한 번 킁 훌쩍이고는 빨개진 눈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큰일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하려 했지만 염소 목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혹시 훌쩍이는 걸 들켰을까. 선생님이 눈치채셨을까. 현수는 심장에 토끼라도 들어온 듯 콩콩대는 것을 느꼈다. 염소에 토끼에.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온갖 동물들이 현수 몸에 들어온 것 같았다.
"괜찮아?"
선생님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훌쩍였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짐작하셨으리라.
현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제발 모르는 척 해주세요.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오늘만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수의 시선은 여전히 책상 위를 향했다.
담임선생님은 그런 현수의 마음을 느꼈는지 "힘들면 선생님한테 얘기해야돼. 알겠지?" 하고는 현수의 어깨를 두어번 더 토닥이고는 지나가셨다.
휴. 다행이다. 현수는 도둑질을 하다 걸릴 뻔 한 유치원생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매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실을 담임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수는 자신을 가장 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점심시간 종이 쳤다. 급식 당번들이 급식을 준비하는 사이, 현수는 식단표를 확인하기 위해 교실 앞쪽의 게시판으로 향했다. 일 년에 한 번 볼까하는 식단표를 확인하다니. 어지간히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이다. 현수는 식욕이 없는 아이였다. 점심시간은 점심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대충 먹는 척 선생님 눈을 피하고 재빨리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는 시간이었다. 아침도,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현수의 엄마는 때에 맞춰 현수의 입에 밥이며김이며 국이며 밀어넣기 바빴고, 현수는 입 안에 잔뜩 넣는 척 놀러 나가기 바빴다. 그런 현수가 이틀째 아침밥을 굶고 학교에 왔다. 아빠는 밥을 할 줄 몰랐고, 현수는 밥을 먹어야 점심 시간까지 배가 고프지 않은 줄 몰랐다.
오늘 급식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참치와 호박이 잔뜩 들어간 국물을 보니 현수는 또다시 콧물이 나왔다. 김치찌개는 엄마가 제일 잘하는 음식이었다. 현수는 다른 건 깨작깨작해도 김치찌개만큼은 야무지게 먹었다. 거기에 엄마는 항상 김과 계란말이까지 반찬으로 함께 내주셨다. 마치 햄버거 세트메뉴인 것 처럼 말이다. 현수는 그걸 <김김계세트>라고 부르며 허겁지겁 먹었다. 그러면 엄마는 한 숟가락도 들지 않고 현수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옅은 미소를 띄우며 가끔 현수의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떼어주셨다. 그리고 가끔 "그렇게 맛있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엄마는 질문을 하면서도 대답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럴때마다 현수는 이상했다. 말의 끝부분 음이 올라가면 물음표가 붙는 거라고 했는데, 그건 질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붙는 기호는 물음표가 아니었다. 하트였다.
아빠도 김치찌개를 좋아했다. 아빠가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으면 엄마는 말의 끝부분을 올리며 물었다. 그때의 기호는 물음표였다. 아빠가 대답을 했으니까.
"어머니가 해주셨던 김치찌개랑 비슷해?"
엄마의 물음표에 아빠는 코를 한 번 킁 훌쩍이고는 답했다. 아빠는 뜨겁고 칼칼한 음식을 먹을 때면 습관처럼 코를 훌쩍이곤 했다.
"비슷하지. 엄마 김치니까."
그러면 엄마는 세모눈이 되어 아빠를 째려보곤 했다.
"그냥 비슷하다. 맛있다. 해주면 어디가 덧나? 하여튼 당신은 해줘도 꼭."
"아, 맛있어 맛있다고."
"에휴."
둘의 대화는 보통 엄마의 한숨으로 끝났다. 엄마가 한숨을 쉬면 현수도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엄마아빠의 대화가 엄마의 한숨으로 끝나지 않으면 꼭 싸움이 커지곤 하니까. "여보, 당신"이 "네가, 야"로 바뀌곤하니까. 목소리가 커지고, 손가락으로 서로를 가리키고, 엄마가 울고... 그렇게 되버리니까. 현수는 늘 엄마가 한숨을 쉬지 않을까봐 조마조마했다. 엄마가 "너는 받아 먹을 자격이 없어."라는 식으로 받아칠까 두려웠다.
급식에 함께 나온 반찬은 진미채와 고구마 맛탕이었다. <김김계세트>가 아니라 아쉬웠다. 하지만 현수는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오늘 저녁에도 엄마가 오지 않으면 또 컵밥을 먹어야 할 것이다. 현수에게 컵밥은 더이상 특별한 음식이 아니었다. 컵밥은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 사이에 한 번씩 껴있어야 특별한 것임을 현수는 그제서야 실감했다.
...
따르르릉~
가방에 있는 키즈폰이 울렸다. 현수는 늘 함께 하교하는 우영에게 말했다.
"우영아, 가방 앞주머니에 있는 내 폰 좀 꺼내줘."
"어? 응."
우영이에게 건네받은 키즈폰의 액정에는 아빠라고 찍혀있었다. 현수는 멋대로 엄마의 전화일 것이라 기대해버린 스스로를 비관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 아빠."
"우리 현수. 왜이렇게 기운이 없어. 학교는 끝났어?"
"네. 우영이랑 집에 가고 있어요."
"그래? 아빠 체크카드 있어? 아빠가 돈 넣어줄테니까 우영이랑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먹어."
"카드 집에 놓고 왔어요. 내일 먹을게."
"에고. 우리 아들이 오늘따라 목소리가 영 안 좋네. 아빠가 기뻐할 만한 소식 알려줄까?"
콩.콩. 현수는 엄마 소식일 것이라 확신했다. 엄마가 집에 돌아온 것이다. 현수는 아까 심장에 들어왔던 토끼가 다시금 심장에 들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귀에도 걸터 앉았다고 직감했다. 그만큼 귀가 쫑긋했던 것이다.
"할머니 오신대."
현수는 공들여 길게 세워놓은 도미노가 기침 한 번으로 와르르 무너졌을 때와 비슷한 낭패감을 느꼈다.
엄마가 아니고?
현수는 할매를 사랑했다. 그러나 엄마보단 아니었다. 현수는 애써 실망한 목소리를 숨기며 답했다.
"언제 오신대요? 할매는 멀리 살잖아요."
"어어. 아빠가 우리 현수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부탁 드렸어. 이제 곧 도착하실 거야. 할머니께 예의 바르게 인사해야한다?"
"응. 알겠어요."
"그래. 현수야. 엄마아빠 일은 아빠가 알아서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랑해."
아빠가 사랑해 라고 말하면 전화를 끊으라는 말이다. 현수도 답했다.
"네. 사랑해요."
현수가 사랑해요 라고 말하면 전화를 끊겠다는 말이다. 둘 사이의 사랑해는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현수의 집은 우영보다 한 블록 더 가야했다. 우영은 709동, 현수는 710동. 현수는 709동이라고 써있는 청록색 지붕 아래에서 우영이와 헤어지고, 한 블록을 더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710동이 다가올 수록 사람 한 명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기다란 흰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검은색 티셔츠 위로 감색 앞치마를 두른 사람. 움츠러든 듯 말린 어깨와 살짝 구부정한 허리.
할매였다.
"할매!!!!!"
현수는 아까 엄마를 더 사랑한다 어쩐다 했던 마음을 까맣게 잊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매다! 할매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