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흐음. 얼큰한 냄새. 코 끝을 찌르는 맛있는 냄새에 현수는 금세 잠이 깨었다.
킁킁. 필히 라면냄새다!
반쯤 뜬 눈을 번쩍 뜨며 현수는 생각했다.
할매표 라면 냄새. 싱싱하고 밍밍한 맛. 오늘은 조르지도 않았는데 라면?
현수는 12월 25일 아침이라도 되는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매는 현수가 이틀은 족히 징징대야 라면을 끓여주곤 했는데. 현수는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할매는 늘 부엌에서, 반쯤은 구부러진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할매의 손톱 색 같이 짙은 황토색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했다.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고 앓는 소리를 하시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척척 했다. 그럴 때마다 현수는 습관처럼 할매의 뒤로 살금살금 걸어가 할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면 할매는 습관처럼 깜짝깜짝 놀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낑깡이 일어났어?”
낑깡이는 현수를 부르는 할매만의 애칭이다. 아빠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르는 할매와 현수만의 비밀 별명이다. 현수는 그 별명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싫었다. 할매만이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할매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비밀 별명 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할매를 놀래키는 것. 할매의 허리춤을 끌어안는 것. 할매가 낑깡아라고 시작되는 살가운 아침인사를 하는 것.
그 일련의 과정이 할매만이 해줄 수 있는 주말 아침의 약속이었다.
와다다다. 늘 그렇듯 부엌으로 향한 현수의 눈에는 의외의 사람이보였다. 그사람은 아빠였다. 할매가 아니고.
현수는 맥이 풀림을 느끼며 아빠를 불렀다.
“오잉? 아빠?”
라면스프를 무심히 흔들던 아빠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현수 일어났어?”
“네! 그런데 할매는? 왜 아빠가 요리를 해요?”
“할머니가 많이 편찮으셔. 오늘은 아빠가 점심 해줄게.”
“에잉? 아빠가요? 할매는 많이 아파요?”
“아빠도 라면은 잘 끓인다구. 할머니는 방에 누워계셔. 아프니까 방해되지 않게 오늘은 아빠랑 둘이 놀까?”
“우와 아빠표 라면이라니. 얼른 먹어보고 싶어요!”
“얼른 맛있게 끓여줄게. 가서 손부터 씻고 올래?”
현수는 서둘러 손을 씻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요리를 하는 낯선 아빠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송송. 탁탁. 치이이. 그리고 휘리릭.
아빠는 뭐든 재빨랐다. 뚝딱뚝딱 벽에 못을 박는 일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할매가 아무리 천천히 가자고 해도 뛰뛰빵빵 소리를 내며 운전을 했다.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 엄마를 보고도 ’왔어?‘라고만 하고 쌩하니 뒤를 돌아버렸다.
아빠는 뭐든 재빨랐으므로 라면 끓이는 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빠는 벌써 다 끓였는지 냄비 뚜껑을 열고 맛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아빠를 보며 현수는 군침을 삼켰다.
“자 먹자~”
아빠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냄비를 식탁에 올리며 말했다.
“와! 잘 먹겠습니다!“ 현수가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먹었다. 텔레비전에서 뚱뚱한 개그맨 아저씨가 국수를 먹을 때 나던 소리를 냈다.
후루루루룩
현수는 그 소리를 내며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라면이 더 맛있어지는 것 같았다.
아빠는 현수가 먹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정신 없이 라면을 먹던 현수가 고개를 들어 아빠가 한 입도 먹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오물조물 씹으며 현수는 물었다.
“아빠는 왜 안 먹어?”
아빠는 대답 대신 물었다.
“어때? 맛있어?”
현수는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며 대답을 대신했다. 아빠의 라면은 할매가 해주던 것과 달랐다. 그보다 훨씬 인중에 땀이 나는 맛이었다. 짜고, 맵고, 강렬했다.
“할매가 해주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
현수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라면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할매표 싱싱, 밍밍, 건강한 라면만 먹던 현수에게 아빠표 라면은 새로운 세상의 칼칼함이었다. 할매는 싱싱, 밍밍, 건강한 음식을 만들며 “구~수하다.”고 말하고는 했다. 그러면 현수는 할매를 따라 “구~수하다.”라고 답했다. 아빠표 요리는 조금도 구~수하지 않았지만 자꾸자꾸 먹고 싶은 맛이었다.
“정말?”
아빠는 현수의 말에 얼굴이 물결치는 파도처럼 변했다. 아빠의 입과 코와 눈과 눈썹과 귀가 꿀렁꿀렁 물결쳤다. 아빠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 동그랗게 말린 아빠의 입술이 이내 길쭉하게 펴지더니 아래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무겁게.
“현수야. 그런데 말이야. 앞으로는 할머니가 요리를 못하실 수도 있어. 현수는 그래도 괜찮아?”
“할매가 요리를 못하면 아빠가 매일 라면 끓여주는 거야?”
“라면은 몸에 안 좋으니까 가끔씩만. 아빠가 라면 말고 된장찌개나.. 음.. 현수가 좋아하는 계란말이 해줄게!”
“오아요”
현수는 입 안에 라면을 가득 넣고 오물조물 씹으며 답했다.
“우리 현수.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현수는 왠지 모르게 슬퍼보였다가 다시 미소짓는 아빠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흐렸다 개었다하는 날씨처럼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아빠는 기분이 좋은걸까, 안 좋은걸까? 알 수 없었다.
크억. 크억.
그때 할매 방에서 기침소리 같은, 그러나 단순 기침은 아닌 듯한 소리가 났다. 아빠는 황급히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천근이라도 되는 듯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뭐든 재빠른 아빠인데. 뚝딱뚝딱. 뛰뛰빵빵, 쌩. 재빠른 아빠인데. 그 순간에 아빠는 발목이 붙잡히기라도 한 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아빠는 할매방 문을 닫으며 말했다. 꽉 닫힌 문 때문에 아빠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현수는 알쏭달쏭해하며 마지막 남은 라면 한 젓가락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방금 들린 그소리는 무엇이었을까. 할매는 많이 아픈 것일까. 흐렸다 개었다 하는 날씨처럼 헷갈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