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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진 Oct 15. 2024

할매가 보고싶다.

(2)

현수는 10살이다. 아빠는 40살이고 엄마는 39살이다. 할매는.. 몇 살인지 잘 모른다. 나이가 무지무지 많다는 것만 안다. 원래 현수는 할매와 따로 살았다. 현수와 할매가 같이 살게 된 것은 현수가 엄마와 따로 살게 된 날부터다. 그렇게 된 지는 이제 9개월쯤 되었다. 


아빠와 엄마는 자주 싸웠다. 현수의 눈에도 둘은 잘 맞지 않아 보였다. 아빠는 뭐든지 재빨리 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뭐든지 느리게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누구의 잘못이 더 큰 것 같냐고 묻는다면 100명 중 49명은 아빠 편을 들 것이다. 나머지 51명은 엄마 편을 들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이 똑같다.'라고 말했지만 1명만큼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빠가 잘못했다고 했다. 그 1명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할매이다. 할매는 항상 엄마 편이었다. 아빠의 엄마인데도 현수의 엄마 편을 들었다. 할매는 버릇처럼 "현수엄마한테 좋은 게 결국 너한테 좋은 것이라고" 당신의 아들을 향해, 그러니까 현수아빠에게 말하곤 했다.


엄마는 짐을 쌌다. 자주 쌌다. 자주 현관문을 나섰고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바람처럼 돌아왔다. 돌아와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빨래를 개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하지만 꼭 할매 얘기를 했다. '할매 덕분'이라고. '할매가 없었으면 우린 벌써 이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빠는 '허참.'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분리수거를 하고, 야구를 봤다. 둘은 꼭 그런 식이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현수는 이혼이라는 말을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현수의 뇌에 이혼이라는 단어는 마치 DNA 유전자 정보처럼 새겨져 있다. 맹수를 보면 저절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도록 우리의 본능에 각인된 것과 비슷하다. 현수에게는 이혼이 맹수였다. 그 단어를 들으면 저절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현수를 방에 들여보내놓고 거실에서 싸웠다. 현수는 방문을 꼭 잠그고 울었다. 아빠의 고함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도 잦아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현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귀를 막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손으로 귀를 막았다 뗐다하는 동시에 입으로 아아아아 소리를 내며 괴로운 청각적 자극을 애써 자신의 목소리로 덮었다. 


그럼에도 띄엄띄엄 들리는 말들.

…당신이……그래서더이상……현수는……

그러던 중 현수는 그 단어를 들었다. 


"이혼해."


현수는 몸이 차갑게 식어옴을 느꼈다. 부들부들. 여름인데도 몸이 떨렸다. 이가 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 안은 뜨거운 것 같았다. 심장에 뜨거운 돌을 집어넣은 것 같았다. 뱃속에 빨간약을 통째로 풀어놓은 것 같기도 했다. 차갑게 식은 몸과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은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현수의 불안을 점령했다.

 

현수는 콧물이 눈물보다 많은 아이였다. 평소에 엄마를 속이기 위해 울 때는 눈물만 또르륵 흘릴 수 있었지만, 이렇게 울부짖을 때는 콧물이 훨씬 더 많이 나왔다. 울 때는 모른다. 진정이 되고 나야 안다. 콧물이 눈물보다 많았음을. 현수는 지금도 콧물이 눈물보다 많이 나오고 있었다. 입 속으로 콧물과 눈물이 뒤섞여 들어가고 있었지만 느낄 수는 없었다. 현수의 이불이,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현수는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거실로 나가서 엄마 아빠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무서웠고, 두려웠다. 


현수는 할매를 떠올렸다. 할매가 약속도 없이 현관문을 '짠'하고 열고 들어오는 날은 1년에 1번 있을까 말까 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상상을 했다. 

할매가 보고 싶다. 

할매가 현관을 열고 들어왔으면 좋겠다. 

엄마와 아빠를 말려줬으면 좋겠다. 

이혼하지 말라고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할매는 '짠'하고 나타나지 않았고, 싸움은 엄마가 짐을 싸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엄마는 짐을 쌀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집을 나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는 집을 나갈 때마다 어떤 날은 현수를 데리고 갔지만, 어떤 날엔 마치 현수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가버리곤 했다. 오늘은 어떤 날일까. 현수를 데리고 갈까? 놓고 갈까? 현수는 고민했다. 엄마가 부르면 따라 나가야 할지, 집에 남아서 아빠를 다독여주어야 할지. 


지익. 

자크를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짐을 다 싼 것이다. 

쿵 쿵 쿵

엄마가 걷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현수를 부를까? 현수에게 뭐라고 말할까? 

삑. 문이 열렸습니다. 휘익. 그리고 쾅.

문이 닫혔다. 엄마는 갔다. 현수를 두고 갔다. 마치 이 세상에 현수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가버렸다.


현수는 버림받은 강아지인 양 온몸을 떨어대며 울었다. 얼마만큼 더 울어야 할지 몰라서 일단 계속 울었다. 





엄마가 며칠째 오지 않고 있다. 벌써 두 밤이나 잤는데도 말이다. 현수는 뚱뚱한 개그맨 아저씨가 나오는 먹방티비프로를 보며 아빠가 데워준 컵밥을 먹었다. 엄마가 있었다면 절대 티비를 보며 저녁을 먹지 못했을 것이다. 컵밥은 캠핑을 갔을 때 빼고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아빠는 '엄마 몰래'를 좋아한다. 현수도 좋아한다. 아빠가 '엄마 몰래'를 말하면 꼭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러 갔을 때처럼 심장이 울렁거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도 좋지가 않다. 엄마 몰래 할 수 있는 것들만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빠도 그런 것 같았다. 엄마 몰래를 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엄마 몰래인데, 엄마 몰래라고 말하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선생님이 뭔가를 말씀하시는데 이상하게 현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현수는 머릿속에 한 장면만 떠올렸다. 엄마가 아빠를 매섭게 노려보고, 아빠가 엄마에게 손가락질하고, 서로 소리 지르고… 하는 장면. 그리고 귓속에서는 그때 들었던 말들이 계속 반복되었다. 


이혼. 이혼. 이혼. 


현수는 순식간에 콧물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콧물이 나오면 안 된다. 콧물이 나오면 그다음은 눈물이다.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학교에서 울면 아이들이 놀릴 게 뻔하다.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정하율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는 참아야 한다. 현수는 애써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를 보았다. 아무런 글씨를 찾아 눈으로 좇았다. 조금 진정이 된다. 다행이다. 


현수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될까. 

정말 이혼하는 걸까? 그럼 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할매는? 

현수는 기어코 콧물을 참지 못하고 킁! 하고 코를 훌쩍였다. 

할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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