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연기는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지난 주부터 시작되었다. 엄마아빠의 연기는 티비에 나오는 배우들 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단, 할매 앞에서만. 할매 앞에서의 둘은 사이좋은 부부였다. 그러나 할매가 주무시거나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금방 예전으로 돌아갔다.
둘은 늘 그래왔듯 서로를 못마땅해했다. 아빠는 모든 걸 빨리 했지만 빈틈이 많았고, 엄마는 꼼꼼했지만 속도가 느렸다.
"그걸 왜 그렇게 해? 다 튀었잖아! 아우 아까워."
"아 뭐! 그럼 네가 해."
"당신이 한다며? 나 없이도 잘 해먹고 산다며?"
"그래 내가 할 거니까 가 있으라고!"
"목소리 안 줄여? 어머니 다 들으시겠어!"
"아이...알겠어. 가 있어. 내가 할테니까."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 명이 할매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다른 한 명이 똑같이 눈치를 보았고, 그러면 의외로 싸움이 쉽게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현수는 둘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할매가 눈치채지는 않을까 아슬아슬했다. 어떨 때는 할매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 할매는 잠귀가 밝아 현수가 물건을 떨어뜨리기만 해도 금새 나와 "우리 낑깡이 어디 다쳤니?"라고 묻곤 했으니까.
할매는 진짜 속은 건지 속아준 척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입원에 동의했다. 또 싸워서 이혼 얘기가 나오면 그날로 바로 퇴원하겠다고 엄포를 놓긴 했지만.
"현수엄마, 엄마 드시는 영양제도 챙겼어?"
아빠가 커다란 짐가방을 들며 말했다.
"어어. 챙겼어. 병실이 추울 수도 있으니까 겉옷만 좀 더 챙겨가려고."
"그럼 거의 다 됐네? 나 먼저 내려가서 차 빼놓고 있을게. 엄마 모시고 내려올래?"
"알겠어. 어머니랑 얘기 좀만 하고 내려갈게."
"그래. 고마워."
"현수야, 너도 아빠 따라 먼저 가 있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현수의 등을 떠밀었다.
"왜? 나도 엄마랑 갈래."
"엄마가 할머니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먼저 가있어 금방 따라 갈게."
"치."
현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아빠를 따라 엘레베이터에 탔다.
"아빠"
"응 우리 현수."
"엄마랑 진짜 화해하면 안돼?"
괜히 물어봤나. 현수는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나빠보이진 않는다.
"휴우"
아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현수는 아빠엄마가 화해했으면 좋겠지?"
"응!"
"현수도 알다시피 아빠랑 엄마는 많이 다른 사람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싸웠고. 어쩌면 아빠 엄마가 헤어지는게 현수에게 더 좋을 수도 있고..."
아빠는 말끝을 흐렸다. 현수는 아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헤어지는 게 나한테 더 좋은 거지? 난 엄마아빠랑 같이 사는게 좋은데. 그게 내 소원인데.
현수는 그렇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아빠는 할머니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지쳐보였다.
"할매 많이 아파?"
"그렇지.. 할머니가 연세도 많으셔서 앞으로 얼마나 우리 곁에 계실지 몰라."
"그러면 할매 죽어?"
현수는 가슴이 콕콕 쑤시는 것 같았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아빠 입만 바라보며 현수는 끙끙 앓는 강아지처럼 조마조마했다.
"어른한테는 돌아가신다 라고 하는 거야. 그럴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병원에 가는 거야. 그러니까 현수도 할머니한테 엄마아빠가 진짜로 화해했다고 말해야 돼. 알겠지?"
"응. 알겠어."
현수는 "거짓말은 절대 안된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던 아빠가 거짓말을 하는 이 상황이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차에 타자 아빠가 자동차 블루투스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어 이건. 라흐 어쩌고인데!
현수가 마음 속으로 느낌표를 띄웠다. 현수는 클래식의 ㅋ도 모르지만 할매가 자주 듣는 곡이란 건 알았다. 할매는 이상하게 이 음악만 들으면 웅장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빠는 일부러 이 음악을 튼 것이다. 할매가 웅장한 마음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면 하는가보다.
웅장한 마음이란 뭘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엄마와 할매가 모습을 보였다. 저멀리서 걸어오는 할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 같았다. 아침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던 할매였는데. 지금은 엄마와 대화를 한다. 아빠는 둘의 모습을 보며 무심코 말했다.
"역시..현수엄마밖에 없다."
그러면서 왜 이혼을 하겠다는 거야.
현수는 이번에도 말을 삼켰다.
할매는 자동차 뒷자석에 앉자마자 말했다.
"라흐마니노프네."
"우리 엄마 기분 좋아지라고."
아빠는 백미러로 할매의 기분을 살피며 말했다.
"웅장해지는 것 같다."
할매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노오란 은행잎이 가을이 중턱에 왔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할매는 얼마나 병원에 있어야할까. 겨울의 중턱이 오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봄의 중턱까진 기다려야 할까?
...
진료실에 들어서자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선생님이 표정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이제 오시면 어떡합니까. 하마터면 큰일 날뻔 했습니다. 오늘 바로 입원할 수 있게 해드릴테니까 지난 번처럼 집으로 가시면 안돼요."
할매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엄마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저희 어머니 잘좀 부탁드릴게요."
"네네. 입원확인서 써드릴테니까 나가서 간호사한테 설명들으시고 절차대로 하세요."
현수는 의사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었다.
우리 할매 돌아가시는 거냐고. 언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냐고.
하지만 엄마아빠의 착잡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런 걸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병원복으로 갈아 입은 할매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아빠가 말을 걸어도 "그래" 나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엄마는 할매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는 아빠가 답답하다는 듯 속삭였다.
"현수아빠. 어머니 쉬시게 좀 냅둬."
"아이, 보호자 한 명만 상주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아쉬워서 그러지."
"피곤하셔서 그럴거야. 오늘은 내가 옆에 딱 붙어서 어머니 간병할테니까 현수 데리고 집에 가."
"에휴. 현수야 할머니께 인사드려. 우린 집에 가자."
현수는 할매가 낯설었다. 오늘따라 할매는 주름이 더 깊게 패인 것 같아 보였다. 말수도 급격히 줄었다. 현수를 귀여워하지도 않았다.
"할매, 빨리 나으세요."
현수는 할매 볼에 뽀뽀를 해주고 아빠 손을 잡았다. 할매는 눈을 살짝 뜬 채로, 손만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집에 가는 차안에서 현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할매가 오늘따라 더 많이 아파보였어."
아빠는 현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머니 병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 것 같아. 현수가 학교 다녀와서 할머니 자주 찾아뵙고,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드리자."
"응 알겠어."
현수는 꼭 그러겠다고 다짐했다.
...
현수는 오늘도 학교가 끝나자 마자 집으로 갔다. 아빠와 병원에 바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수학 학원도 당분간 가지 않기로 했다. 며칠 째 학교-병원-집의 생활을 이어가다보니 우영과 함께 했던 방과후의 시간들이 언제였던 건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현수와 우영은 화해를 한 것도, 그렇다고 안 한 것도 아닌 사이로 지냈다. 점심시간마다 같은 팀이 되어 축구를 하는 탓에 "뒤에 수비수", "나이스!"등의 축구용 대화를 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편한 친구 사이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현수는 답답했다. 사과를 받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우영과 놀고 싶었다. 학교에서만큼은 다 잊고 우영과 시시한 장난을 치고 싶었다. 학원을 빠지고 닌텐도나 하러 가자던 우영이 그리웠다. 그리고... 할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우영에게 알리고 싶었다.
"우영."
현수는 용기내어 우영에게 다가갔다. 신발을 갈아신던 우영은 현수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현수는 혹시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우영아. 오늘 집에 같이 갈래?"
우영이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현수를 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우영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실내화 가방을 신발장에 넣었다.
"별로. 같이 가고 싶지 않아."
"왜?"
현수는 따지듯 물었다. 우영의 얼굴을 보니 영영 사과 받기는 틀렸다고 직감했다.
"그냥."
우영은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현수를 지나쳐 갔다.
현수는 이 세상에 자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혹시 다른 친구들이 들었을까 부끄럽기도 했다.
왜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거야. 내가 자기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어쩔 수 없이 혼자 집에 갔다. 그날 현수의 걸음을 묘사하자면 털레털레였다. 저 앞에서 걸어가는 우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꼭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흥. 못생긴 정우영."
현수는 괜히 입밖으로 소리내어 우영을 흉봤다. 오늘 따라 정우영의 뒷통수가 더 납작해보였다.
...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아빠의 빨리빨리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현수야. 빨리 손 씻고 옷 갈아입어."
"어어. 알겠어요."
"현수야 아빠 차 빼놓고 있을테니까 빨리 내려와."
"엥? 나랑 같이 내려가면 안돼요?"
"엄마 밤샘 근무해서 힘들거야. 우리가 빨리 가서 교대해줘야지."
"피.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아빠와 함께 차를 타고 병실에 가면 엄마는 많은 경우 졸고 있었다. 엄마의 다크써클은 에버랜드에서 봤던 팬더와 비슷하게 거뭇해져 있었고 피부도 칙칙해진 것 같았다. 우리가 가면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어머니 뭐 필요한 건 없으세요?"
엄마는 그 말이 꼭 입에 붙은 사람 같았다. 엄마는 할매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희영아. 네가 고생이 많다. 내일은 안 와도 되니까 좀 쉬어라."
할매도 그 말이 꼭 입에 붙은 사람 같았다. 할매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현수 엄마, 얼른 들어가서 쉬어. 오늘도 고마워."
아빠도 그 말이 꼭 입에 붙은 사람 같았다. 아빠도 엄마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보여주는 걸까?
"고맙긴 뭘. 어머니 오늘은 항생제 맞으셨고, 교수님 회진은 아직이야."
아빠와 엄마는 어떤 마음인 걸까? 현수는 알쏭달쏭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