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해 보기, 비우기. 250517 토요일
학교-자취방-일했던 학원-본가-친구집을 오가는 요 며칠간의 스케줄 덕분에 내 짐도 최대한 가볍게 해야했다. 따라서 필수로 들고 다니는 물건들이 전부 가방에서 빠졌다. 휴지, 핸드크림, 양치 세트, 립밤, 충전기와 보조배터리 등이었다. 이 물건들은 정말 어디를 가나 항상 함께였는데 없다 보니 어제와 오늘 이틀간에도 그 빈자리가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가는 지금 나의 3년 반 써서 광속으로 닳는 핸드폰 배터리가 22%이고, 양치질도 못해서 개운치 못하며 핸드크림이 없어 손등이 건조하다.
다소 허전하지만 어차피 집에 있을 거고 다시 챙겨 다닐 거니까, 잠시 참는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방은 다른 물건을 넣었는데도 참 가벼웠다. 사소한 물건들이지만 한 데 모이니 무게가 꽤 나갔던 것이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정하고 한 번도 빼먹지 않았는데, 이렇게 이틀을 났다. 나의 '필수'는 어디까지일까? 사실은 아주 잠시 외출하고 돌아올 수도 있는데, 과한 준비가 어깨만 무겁게 했던 건 아닌지.
본래 원칙주의에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다.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좀 없다. 생각의 관성이 나를 짓누르면 단순한 생각 전환도 해내지 못해 고생 한다. 하지만 지난 몇 번의 여행에서 배운 건, 비워야 채워지며, 무언가 없으면 임시방편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방에 물티슈쯤 없으면 어떤가, 손을 씻으면 되는데. 정 필요하면 사면되고 심지어 옆 사람에게 부탁해서 얻으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꾸만 내 틀에 갇히려고 하는 나에게, 가방에 넣을 물건을 고민하느라, 목적지를 계획하느라 늦게 나가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그냥 생각 없이 핸드폰만 달랑 들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입술 좀 건조하면 어때. 핸드폰 배터리 좀 모자라면 어때. 다 방도가 있을 건데.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항상 함께하던 사람이 자리를 비운 것처럼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과 친해지려고 한다. 스스로 준비된 채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다른 무언가를 찾아보고 때론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기도 해 보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도 항상 준비물을 빌리는 친구들이 있다면 나는 항상 그 애들에게 빌려주는 입장이었다. 내 소중한 물건이 그 애들에겐 남의 것이어서 가끔 함부로 다루거나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물건은 내가 지킨다고 생각했고, 남에게 무언가 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불편하게 느끼니까 남도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든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세 지기 미안해서 싫고, 내 물건은 내가 잘 관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물건을 넉살 좋게 빌리다가 친구를 사귀기도 한다. 빌린 걸 핑계로 감사 인사를 할 계기가 생길 수도 있다. 뭐, 물건이 없으면 최소한 가방에 한 자리는 남으니 이것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생각보다 필요치 않은 걸 짊어지고 사느라 새로운 걸 놓치긴 싫다. 나에게 필수는 무엇일까? '반드시', '절대'라는 가치가 있나? 더 큰 가방을 찾는 관성을 깨고 든 물건을 빼보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다. 삶에서 너무 많은 걸 다 해낼 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