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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도 은혜도 없는 마음

김엄지 「그 다음 일」

by 서정아

걷다가 지쳐 앉을 만한 돌을 찾아 앉았다.

앉은 곳 바로 앞에 물이 흐르니

손가락을 담가 뭐라도 써보고 싶었다.


물에 쓴 은혜. 돌에 쓴 원수.

아직 물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원수는 수백 수천 번 마음에 새겼다.

새긴 자리에 또 새기니 마구 파여

정작 원수의 이름은 희미하다.


참삶을 사는 사람은

원수도 은혜도 없는 마음이려나.

참삶을 사는 사람은

무엇도 쓰지 않고 살겠지.


- 김엄지 「그 다음 일」 중에서


서있는여인 스케치.jpg A Study of Miranda for ‘The Tempest’ (c. 1786)George Romney (English, 1734-1802)

<나의 단상>


은혜는 쉽게 흘러가버리는 물에다 쓰고

원수는 단단한 돌에다 쓴다는 말.

수백 번 수천 번 새기고 또 새겼더니

정작 그 원수의 이름은 희미해졌다는 말.

그러니 결국 파인 것은 우리의 마음뿐이겠지.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과 마구 파여버린 마음.


원수도 은혜도 없는 마음이면

평화롭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서는

참삶을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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