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엄지 「그 다음 일」
걷다가 지쳐 앉을 만한 돌을 찾아 앉았다.
앉은 곳 바로 앞에 물이 흐르니
손가락을 담가 뭐라도 써보고 싶었다.
물에 쓴 은혜. 돌에 쓴 원수.
아직 물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원수는 수백 수천 번 마음에 새겼다.
새긴 자리에 또 새기니 마구 파여
정작 원수의 이름은 희미하다.
참삶을 사는 사람은
원수도 은혜도 없는 마음이려나.
참삶을 사는 사람은
무엇도 쓰지 않고 살겠지.
- 김엄지 「그 다음 일」 중에서
<나의 단상>
은혜는 쉽게 흘러가버리는 물에다 쓰고
원수는 단단한 돌에다 쓴다는 말.
수백 번 수천 번 새기고 또 새겼더니
정작 그 원수의 이름은 희미해졌다는 말.
그러니 결국 파인 것은 우리의 마음뿐이겠지.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과 마구 파여버린 마음.
원수도 은혜도 없는 마음이면
평화롭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서는
참삶을 살 수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