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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된 시간, 그 이후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by 서정아

집이 불에 타오를 때에만

처음으로 집의 골조가 또렷이 드러나듯이,

운명의 극단적인 한계에 도달한

예술 고유의 근원적인 모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중에서


Time and Truth (1696–1770)Giovanni Battista Tiepolo (Italian, 1696-1770)

<나의 단상>


예술뿐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에서도,

나를 둘러싼 이 세계에서도,

극단적 한계 상태에 다다르면 결국

근원이 드러나고야 만다.

그러니까

불에 타고 있는 그 순간은

오직 고통뿐인 것 같지만

불에 다 타고 나서야 나타나는 것들,

그 근원을 인지하고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면

고통이 고통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진된 시간들이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에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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