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애매 Sep 25. 2023

EP14. 그녀는 정말 수고했다.

첫 후임을 떠나 보내며

꼬박 5일만에 헤어짐을 준비하다니요.

목요일, 그녀는 몸과 마음이 아파 출근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한 건 그녀의 애인이었고 나는 놀라기보다는 걱정스러운 마음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며 덜컹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금요일, 조금 정신을 차린 그녀가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일요일, 그녀의 입에서 '당분간 함께 일하기는 무리일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고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월요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그녀가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 나타났다. 1등으로 출근한 나의 뒤를 이어 2등으로 도착한 그녀를 보며 이 공간에 우리 둘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꼬옥 안아주었다. 주말 내내 그녀를 만나면 어떤 말을 먼저 건네야 할지 수없이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이나 할만 한 말을 찾지 못해서 '수고했어'라고 말해버렸다. 그녀가 꽤나 아프기 시작한지 5일만에 지난 9개월을 정리하며 묵묵히 이별을 준비해야 했기에 가장 함축적이고 효율적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정말 수고했다.

'수고했어'라는 말을 그냥 내뱉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수고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본인을 위한 것이든, 회사를 위한 것이든 혹은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이든 말이다. 무엇보다도 눈치와 촉으로 사회생활을 연명하고 있는 나의 눈에 그녀가 불안정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간들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고했다 말할 수 있겠다. 누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사적인 이야기는 잘 묻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어떤 일과 고통이 있었는지는 보내줘야 하는 이 시점에도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그녀는 정말 수고했다. 유독 넘치는 아침 잠을 이겨내고 9시가 되기 전에 출근한 것도, 지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고차를 뽑은 것도, 제대로 된 신고식을 준비한다며 소품까지 사들고 와 노래와 춤을 선보인 것까지도 수고가 아닐 수가 없다.


그녀는 나보다 1살, 정확히는 20개월 정도 어렸다. 언니오빠 구분 없는 나라에서는 충분히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정도의 차이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녀보다 몇 년 빨리 사회에 나와 이 직군에 적응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의도치 않게 꽤 명령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중심에 선 팀을 꾸리면서 받게 된 첫 후임이었기에 많은 욕심을 부렸던 듯하다. '내새끼는 나만 욕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녀가 어디 가서 상처 받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고, 그 방법 중 하나로 팀 내에서 그녀를 모질게 가르치며 빠르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을 택하기도 했다. 관련 학과 전공자의 취업률이 높은 이 업계에서 '너와 나는 타 전공자, 다시 말해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를 물고 몇 배 더 잘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그녀는 버텼고, 잘해냈고, 정말 수고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리 모질지도 않았지만, 조금 더 잘해줄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일단 사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아무튼 월요일 아침, 수고했다는 말과 포옹을 나누면서 그녀가 생각보다 더 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녀를 진심으로 안아줄 일이 없었기에 그렇겠지만, 그만큼 가족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나는 어떤 말을 하려는지 모를 그녀의 눈을 정말 좋아했는데, 월요일 아침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버린 쌍꺼풀 때문에 조금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처럼 개구리 같다며 장난을 치고 싶었지만, 눈을 마주치자마자 붉어신 눈시울을 보며 턱 끝까지 올라왔던 농담이 쏙 들어가버렸다. 이럴 때 휘말려서 같이 울면 안되니까 더 많은 말을 하고 눈을 굴리며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빠르게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과장이 아니고 언니 된 입장으로서 그녀에게 해줄 말은 '거지처럼 살아도 일단 살아나가는 게 중요하니까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아'였다. 어차피 전문적이고 멋진 말을 해주기는 글렀으니 어떻게든 살아나가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다. 울면서도 꾸역꾸역 알겠다고 하는 그녀를 보며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녀는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고 담배불을 빌릴 줄 알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제 밥그릇을 찾을 줄 아는 용기있는 여성이니까.


아무튼 공식적인 팀 개편이 있기 전까지 나의 첫 팀원들과 어떤 위기도 헤쳐나가고 그들이 성장하는 데에 일조하며 멋지게 마무리하기를 바랐던 나의 꿈은 무산되었다. 나도 과장은 처음이고 제대로 된 선임으로 살아가기는 처음이라 모든 일에 서툴렀기에 유독 안개가 자욱한 물길 속에서 유독 휘청거리는 작은 배를 목적지까지 이끌고 가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냥 지나칠 뻔한 작은 섬에 선원 한 명을 내려놓고 다시 목적지까지 향하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만, 부디 그녀가 그 섬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며 또 다른 배의 선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 미련을 둘 필요는 없겠다.


수고했고, 고마웠고,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족하게 굴어서 너무 미안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EP13. 일소일소 일노일노 얼굴마다 쓰여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