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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 Feb 13. 2024

시절 인연과 시절인연, 그리고 너와 나의 엔딩 크레딧





 '시절인연’이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입니다. 불교의 업설과 인과응보설에 의한 것으로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마치 ‘운명’처럼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무언가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죠.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일어날 일은 모든 시기가 적절히 맞아떨어질 때 일어난다는 겁니다.

무력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나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 또한 누군가의 장난질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길가에 있는 돌멩이 정도로 치부할 수 있어요. 이렇게 보면 긍정적인 단어 같기도 하죠.


저는 이 단어를 처음 봤을 때 ‘시절 인연’인 줄 알았어요. 요즘 흔히들 말하는 ‘기간제 베프’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에만 있는 인연 ⋯⋯.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학창 시절 친구들도요. 어렸을 땐 매일을 붙어 다녀서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이젠 물어보지 않는 이상 서로의 일상을 알 수 없습니다. 대화를 나눠도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현저히 적어져요. 서로 하는 일도 다르고 만나는 사람도 다르니까요.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갔다가 얼른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친구와의 만남이 힘든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상황이 조금 피곤하고 힘에 부칠 뿐이죠.


저도 얼마 전에 꽤 친한 친구와 멀어지게 됐는데요. 왜 친구들끼리도 권태기가 오잖아요. 짧게 하는 연락들이 조금 귀찮아지고, 가끔은 만남을 갖고 싶지 않은. 이 친구와도 몇 번 권태기가 있었습니다. 그럴 땐 좀 덜 연락하고 덜 보면 돼요. 그럼 자연스럽게 극복되거든요. 근데 이번엔 달랐어요. 진짜 멀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친구 사이가 1, 2년 된 게 아니니 딱 알죠.


사실 위에 문단을 쓰기 전에 그 친구와의 마지막 연락과 멀어진 걸 느끼게 된 계기를 적었는데요. 하나하나 이르는 느낌이 들어 다 지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요. 멀어진 건 멀어진 거고 그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니까요.


저는 감정의 고도가 크고 깊게 빠지는 편이에요. 그래서 항상 중간을 유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요. 너무 좋아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않게. 모든 만남에는 이별을 염두에 두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요.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정제해서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을 크기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마음이 제법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우리도 시절 인연 중 하나인 거니까 슬퍼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몇 주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해요.

그 친구가 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하고, 이해가 안되다가도 하다가요. 보고 싶고,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고, 자꾸만 예전을 떠올려요. 그러다가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닫죠. 자연스럽게 끊어진 걸 억지도 잇는다고 해서 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우리의 관계가 시절 인연이 아니라 시절인연이었다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나아요. 사실은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가 너무 매정해서 찾아봤었거든요. 잘못 알았다는 걸 알게 되니까 조금 안도한 것도 있어요. 이별이 그렇게 매정한 건 아니구나 해서.


아무튼요. 인간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거니까요. 수많은 이별에 있어서 자신에게 이유를 찾고 지나간 걸 그리워하며 나를 갉아먹지 말고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여기까지구나 하고 그만 엔딩 크레딧을 띄워야겠어요.


나라는 상영관은 단 하나잖아요. 이미 끝난 영화의 크레딧을 띄우지 않으면 다음 영화를 재생할 수 없어요. 저도 이 글을 끝으로 그만 막을 내리렵니다. 우리 모두 추운 기억은 덮고 곧 다가올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기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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