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장 부귀와 빈천/부여귀 시인지소욕富與貴 是人之所欲也
빈천은 사람들의 싫어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도道로써 그것을 버려야 하는데, 이를 얻지 못하면 버리지 않아야 한다.
貧賤。人所惡也。然不以其道得去之則弗去也。《논어고금주》
여기서 “도道”는 ‘정상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비록 빈천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빈천을 버릴 때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 방법이란 과연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중요한 단서는 ‘묻는다[問]’는 것이다.
한번 빈천을 얻으면 오직 이를 버리지 않는 것을 법으로만 삼고 그것이 도道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머리를 흔들며 불문不問에 부친다면, 이것이 군자의 시중時中의 도리이겠는가? 오직 그 도로써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그 도로써 버리는 것을 얻지 못하였을 때는 (부득이) 이를 버리지 않을 뿐이다.
一得貧賤。惟以不去爲法。道與非道。掉頭不問。豈君子時中之義乎。唯不以其道得去之則不去之而已。《논어고금주》
《한글 논어》는 “거去”를 “피하다”라고 번역했는데, 문맥상 ‘떠나다’로 이해하면 적당할 듯하다. 다시 말해 내가 아닌 다른 요인으로 빈천에 처하게 되었더라도, 그 빈천에서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부귀에 대한 공자와 정약용의 조언은 현시대에도 충분히 수용 가능하지만, 빈천에 대한 조언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 정도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빈천한 환경, 흔히 말하는 ‘흙수저’로 태어난 것에서 떠나거나 버리지 말라는 말이 과연 공정한 것인가?
안연은 실제로 공자의 이 말을 실천했다. 빈천에 처하면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떠나지 못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는데, 아무튼 결과는 그렇다. 후학들은 안연에 대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 이른 성인聖人으로 추앙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죄의식에 기인한 보상 심리일 수도 있다. 후학들은 유학자임을 자처하면서도 대부분은 빈천에 처한 안연보다는 부귀를 획득한 자공을 흠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