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하는 사랑에서 하고 싶은 사랑으로
내일은 아들의 퇴소식이다.
입소식 날부터 기다려온 날이다. 다치지 않고 잘 마치길 바랐는데, 그 소망은 이뤄진 것 같다.
훈련 기간 동안 주말마다 한 시간씩 통화할 수 있었다. 아들은 그 한 시간을 꼬박 채워 통화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와 숨소리만 들어도 안심이 되었다. 그는 훈련소 이야기를 들려줬고, 나는 그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위로도 하고 칭찬도 했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면 나는 그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 한 시간은 아들과 이어지는 유일한 끈이었다.
어느 날은 아주버니 생일 자리였다. 시댁 식구들과 고깃집에 앉아 있는데, 아들의 전화가 왔다. 불판 위에선 고기가 타고 있었고, 나는 집게를 들고 말을 하며 고기를 뒤집었다.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아들은 “엄마, 그럼 다음에 통화할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입에 넣은 고기 한 점이 목에 걸리는 듯했다. 미안했다.
또 어느 날은 비대면 줌 강의를 듣는 도중 전화가 왔다. 음소거를 하고 이어폰으로 아들과 통화를 했지만, 강의도 아들의 말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 전화를 놓치고 싶지 않을까?’
얼마전 추석 연휴에도 전화가 왔었다. 추석 음식으로 고구마 튀김, 동태전을 부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들은 “와, 고구마 튀김 먹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귀여웠다. “그래, 그럼 엄마가 퇴소식때 만들어 갈게.” 라고 대답은 했지만 부담스러웠다. 퇴근 후 고구마를 썰고 튀김옷을 입히는 상상을 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얼마 전 엄마 집에 갔을 때, 엄마가 말했다. “퇴소식 때 형진이 좋아하는 게장 해 가. 잘 먹을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엄마, 내가 직장 다니면서 언제 게장까지 만들어 가요?” 엄마는 “다들 퇴소식에 음식 좀 해가지 않냐”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했다. 그 말이 서운했다. 나는 속으로 되묻고 싶었다. ‘엄마, 왜 내 사정은 생각 안 해요?’라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는 왜 아들이 먹고 싶다는 말에 만들어가겠다고 했고, 막상 하려니 귀찮았을까? 왜 엄마가 게장을 하라 했을 때 그렇게 발끈했을까? 그건 ‘해야 하는 사랑’과 ‘하고 싶은 사랑’의 경계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마 튀김 하나에도 두 마음이 동시에 있었다. 의무로 하는 일과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일이 뒤섞여 있었다. 아들이 먹고 싶다 했을 때 느낀 귀찮음, 엄마가 게장 하라고 했을 때의 짜증은 사랑을 강요당할 때 생기는 피로감이었다. 누군가 내 안의 ‘해야 한다’는 단추를 누르는 순간, 마음이 방어적으로 닫혀 버린다.
며칠이 지나도 고구마 튀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진 고구마를 먹으며 웃는 아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반차를 내고 고구마 튀김을 하기로 했다. 이번엔 ‘해야 하니까’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다. 그 마음의 출발점이 다르다. “형진아, 네가 먹고 싶다던 고구마 튀김, 엄마가 했어.” 그 한 마디면 충분하다. 사랑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