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사는 건 돈이지만 길을 여는 건 나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가방을 열어 지갑을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밤, 지갑에서 15만 원을 꺼낸 후 지갑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나온 듯했다. 지갑 안에는 신분증이 있었다. 핸드폰으로 비행기표만 확인하고 서둘러 나오느라 신분증을 챙기지 못했다.
공항 전광판에는 크게 ‘신분 확인’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탑승권과 신분증을 준비하라는 안내문도 보였다. 나는 옆에서 앉아 있던 직원에게 다가갔다.
“신분증 없으면 비행기를 못 타나요?”
“운전면허증 있으시면 1층 무인발급기에서 운전경력증명서를 떼오시면 되요.”
방법이 있다는 말에 안도했다.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했다. 그 생각도 잠시 시간이 촉박했다.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갔다. 무인발급기를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분홍색 기계가 바로 보였다. 그런데 앞에 붙은 A4 용지에는 ‘고장 뒤쪽 엘스칼레이터 옆 무인발급기를 이용하시오’이라고 적혀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뒤쪽을 둘러봤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결국 내가 내려온 에스컬레이터 반대편으로 다시 뛰었다. 목에 두른 머플러를 풀어 헤쳤다. 50미터를 달렸다. 그제서야 무인발급기 한 대가 보였다.
화면을 터치했다.빼곡한 화면 메뉴를 보니 뭘 눌러야할지 알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교통(경찰청)’을 눌렀다. 운전경력증명서를 찾았다. 결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지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내 화면을 들여다보며 “뭐가 이렇게 복잡해요”라고 말했다.
발급 버튼을 누르자 지문 인식 문구가 떴다. 인감증명서를 발급받을 때 지문 인식이 잘 안 됐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슴이 뛰었다. 엄지손가락을 대자 실패했다는 문구가 나왔다.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는 시계를 계속 들여다보았다. 다시 손가락을 눌렀다. 떨림이 느껴졌다. 세 번째에서야 ‘확인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화면이 바뀌자 용도 선택 칸이 나타났다. 익숙한 단어는 없었다. 고민할 시간이 없어서 ‘취업용’을 눌렀다. 기계가 돌아가며 증명서가 출력되었다.
증명서를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조금 전만 해도 짧았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핸드폰에는 탑승이 시작됐다는 알림이 왔다. 앞에는 서른 명 정도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나는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하지 못했다. 내 사정을 말하지 못하는 내 성격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35분이 되자 항공사에서 전화가 왔다. 40분에 탑승을 마감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신분 확인 줄에 서 있는데…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지만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다행히 줄은 빠르게 줄었다. 신분 확인이 끝나자 바로 보안 검사를 받았다. 국내선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걸 후회했다. 옷과 가방을 벗어 올리고 검사대를 통과했다. 19번 탑승구는 오른쪽 끝에 있었다. 시간은 이미 45분. 비행기 이륙 시간은 55분이었다.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때 공항 안내원이 뛰는 나를 보고 목적지를 물었다. 19번이라고 말하자 내 이름을 묻고는 안내봉을 들어 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다시 뛰었다. 탑승구에 도착해 휴대폰으로탑승권을 태그했다. 겨우 비행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의자에 앉자 비로소 숨이 가라앉았다.
버스가 움직일 때까지 문을 잠그지 않은 걸 보니 꼴지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한 가족이 숨을 몰아쉬며 버스에 올라탔다. 여자는 “아유 죽을 뻔했네”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만 힘든 줄 알았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곧 비행기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그제야 마음속에서 오늘 일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탑승권은 일주일 전에 돈을 지불하고 샀다. 돈을 냈기 때문에 내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 사실만 믿고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정작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해 준 건 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한 장의 신분증이었다.
돈으로는 자리를 살 수 있지만, 나라는 사람을 증명해주는 건 돈이 아니었다. 그 한 장이 없으면 아무리 비싼 자리가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것을 잊고 살았던 걸까. 우리는 흔히 돈이 있어야 편하고, 돈이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고 믿는다. 돈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오늘 나는 아주 다른 사실을 배웠다. 돈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신분증이 없으면 비행기를 못 타듯, 삶에서도 나라는 사람의 신뢰·품성·태도가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규정 앞에서 내 신분을 증명하듯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의 말, 행동, 약속이 나를 증명한다.
돈은 잃으면 다시 벌 수 있지만, 신뢰는 잃으면 다시 쌓기 어렵다. 오늘 나는 그것을 몸으로 배웠다. 내가 가진 돈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먼저 가꾸어야 하는 것도 결국 ‘나’다. 오늘의 목적지는 제주도였지만, 진짜로 향하고 있던 곳은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