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면 갔을까?

사람의 흔적이 마음에 남는 방식에 대하여

by 청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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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 통의 전화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20년 전에 이혼한 남편의 체납고지서가 여동생네 집으로 계속 간다며 더 이상 보내지 말아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뜻밖의 소식을 덧붙였다.

며칠 전 중국 대사관에서 전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체납고지서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그녀는 과연 그곳으로 갈까?’라는 생각이었다.

전남편은 15년 넘게 해외에서 홀로 살았다고 했다. 그동안 날아온 빨간 체납고지서는 여동생이 부담스러워했고, 딸이 대신 납부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지서를 멈출 방법을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두 사람의 지난 시간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외국에서 힘든 일을 하며 살아왔다. 연락할 다른 가족이 없었나 보다. 결국 대사관은 전부인에게까지 연락을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 한쪽이 쓰렸다. 혼자 타국에서 쓰러진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점심시간에 김계장에게 물었다.

“자기라면 전 남편 보러 갈 것 같아?”

김계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갈 것 같아.”

머리로는 사람이 죽음 앞에 있다면 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내 삶에 대입하니 ‘가야 한다’는 말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혼은 남남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20년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왔고, 좋았던 기억보다 상처가 더 많은 관계라면 ‘왜 나를 부르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들 수도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대사관에서 걸려온 그 전화는 분명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설령 중국에 간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쓰러진 사람을 돌보는 일. 그리고 다시 돌아와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는 일. 그녀에게는 이제 그를 챙길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돈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각각의 계절』 속 ‘무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미는 현수를 믿고 땅을 샀다. 땅값이 떨어지자 그를 원망했고, 현수는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땅값이 오르자 소미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때야 현수가 떠올랐다. 보고 싶었지만 찾지 않았다.

독서모임에서 나는 “그래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죠”라고 말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정말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나?’ 말로는 사람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내 감정과 편의가 먼저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가야 할 자리를 알면서 가지 못한 적도, 손을 내밀어야 할 때 이익을 먼저 따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를 ‘사람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말을 해왔다.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때때로 나를 속이기도 했고,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쉽게 판단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그동안 나는 아닌 척하며 살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도, 회피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외면했던 이유도 결국 나의 ‘착한 척’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싶다. 착한 척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나에게 더 인간적인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차분하게 나의 일을 처리했다. 전 남편에게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주민세가 부과되어 있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한국에 없었기에 부과취소하면서 체납을 정리했다. 그 남자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기록들이 하나둘 지워졌다. 민원인의 요구도 깔끔하게 해결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잔여물이 남았다.

현실에서 흔적은 지워졌지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사람의 흔적은 기록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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