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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는 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

by 다정한 세상

며칠 전 미국에 사는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 과정에 대한 걱정 어린 관심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염려하는 내용이었다. 그분은 이제 70대 중반이 넘은 나이이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활동적으로 살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의 이민 노동자와 불법 이주자들을 돕기 위한 일을 해온 그녀는 지금도 트럼프에 의해 불법적이고 비인도적으로 체포되고 추방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트럼프와 머스크 정권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범죄적인 집단인지 분노하고, 매일 나오는 참담한 뉴스에 낙담하면서도 매일 그들과 싸우기 위해 힘을 낸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과 노력, 그것이 이뤄낸 성취를 보면서 힘을 얻는다고 하였다.


사실 나는 최근에 내 친구가 투쟁하고 있는 이민-이주민 문제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는 책을 읽었다. 영국의 역사가이며 BBC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영국보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더 오래 산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이주민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이 책을 썼다.

<이주하는 인류Migrants - The story of Us All>는 인류가 처음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의 모든 바다와 땅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시간대별로 따라간다. 그 길에서 우리는 그의 개인적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역사서가 전달해주지 못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 지향점, 생활양상을 실감 나게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지금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난민, 이주 노동자, 불법 체류자 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관점을 제기한다.


정주하는 삶이 이동하는 삶보다 우월한가? 인간은 원래 정주를 지향하는 존재인가?

정주자가 이주민에게 주장하는 우월성/우선적 권리는 타당한가?

언어와 종교, 혈통의 동일성이 국경과 국민국가의 성립에 타당한 조건이 될 수 있는가?

그에 따른 여권제도의 확립은 과연 공평한가?

혈통주의 혹은 순혈주의는 과학적으로 과연 가능한가?

이주 노동자를 합법적 정책을 통해 통제하고 불법적 이주를 틀어막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 책은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지는 수 만년 동안의 역사가 ‘이주하는 인류’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곳에서 살았던 유인원과 인류의 조상(호모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도 포함한)을 구분하는 확실한 차이가 '이주성'이다.


대부분 현대인들의 DNA 중 1-4퍼센트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인간 아종의 혼합은 현생 인류의 대부분이 혈족관계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남태평양 주민에서부터 인도 농부, 시베리아 유목민, 온갖 종류의 유럽인, 인디언에 이르기까지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지는 민족들이 사실은 사피엔스뿐만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도 공유하고 있는 혈족들이다. 유일하게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호모 사피엔스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같은 혈통을 대대로 이어온 종의 후손들로 한 번도 그곳을 떠난 적이 없는 사람들뿐이다. 사실 인류의 방랑벽은 선사시대부터 엄청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과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인류의 특성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노력했고 ‘방랑벽 유전자(DRD4-7R)’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한 곳에 머물러 사는 것을 더 좋아하고 정주민이 이주민이나 방랑자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는 일반적인 관념이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 새로운 이주민이 들어오면 현지인과 이주민은 전쟁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혼인과 공존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또 시간이 흐르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나가기도 한다. 잘 아는 바이킹의 서유럽으로의 이동이 그 좋은 예이다. 기근과 자연재해를 피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바이킹은 혼인관계를 통해 유럽의 여러 도시에 정착한다. 물론 전쟁을 통해 정복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 그들이 이주민이라고 해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귀족들은 바이킹의 영웅과 혼인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왕자라고 여겨진다. 트로이 멸망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자 아이네이아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고 그의 후손이며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Romulus가 나중에 로마가 된 도시의 기반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로마 공화국을 로마 제국으로 대체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아이네이아스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가문 출신이다.


또 다른 재미있는 사례 하나로 영국-이스라엘-세계연합British-Israel-World Federation이라는 조직이 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실종된 지파 중 하나인 단Dan지파가 영국에 도착하여 그 후손들이 영국인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20세기 미국에서 <세계 하나님의 교회Worldwide Church of God>라는 조직의 기본 이념을 제공한다. 곧 미국과 영국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지파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설립자는 독일인이 앗시리아인의 후예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영국인이 단부족의 후예라는 신념을 고수하면서도 중동에서 오는 이민자들을 맹렬히 반대하며 브랙시트BREXIT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바빌론과 같은 유럽연합EU으로부터 영국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고대 바빌론은 인종의 용광로와 같았다. 그 지역은 이스라엘, 이집트, 페니키아, 페르시아 등에서 온 이주민으로 들끓었다. 유대인처럼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 왕이나 독재자의 억압을 피해 온 사람들,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 등 다양했다. 그들은 소수의 잡혀온 사람들을 빼고는 이동의 제한이 없었다. 재산도 소유할 수 있었으며 계약서에 서명하고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었다. 고위직에 오를 수도 있었다. 타민족 간의 통혼도 많았다. 그러나 민족적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유대인들이 생겼다. 성서에 기록된 에스라라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귀환한 뒤 ‘거룩한 씨’가 섞이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유대인들은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추방하기로 합의했으며 추방된 이들은 성경에서 잊힌 존재가 된다. 아마도 그들은 이스라엘 주변의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인 가나안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은 역사적 순혈주의와 현대의 민족국가라는 관념이 결합해 만들어낸 비극이다.

저자가 이 밖에도 수많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주장하는 것은 어떤 지역도 그 땅에 이미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 온 사람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근세 이후 현대까지의 인류의 이주도 역시 대단히 활발하게 이뤄졌다.

큰 흐름으로 보면 유럽과 아시아에서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의 이주, 아프리카 흑인들의 납치와 상업적 거래에 의한 아프리카 주민의 유럽과 아메리카로의 이주,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 일어난 여러 정주인들의 이동이 있다. 또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전쟁, 기근, 질병을 피해 이주하는 난민들이 유럽과 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하고 있고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잘 사는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끊임없는 이주행렬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주의 행렬을 촉진하거나 가로막는데 민족국가 혹은 국민국가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기존의 역사서가 잘 보여주지 않았던 사실 중의 하나를 보자면,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국이 해체되고 국민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이주민이 생겨났다. 다들 혈통이나 언어, 종교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국경이 그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그 지역에 이미 자리 잡고 수 세대 혹은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이주를 강요받았던 사례들이 적지 않다. 전쟁 과정과 그 이후 수백만명의 비자발적 이주가 강요되었다. 구 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일어났던 고려인들의 강제이주도 그중 하나이다.

1923년 이뤄진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인구교환’ 사례도 있다.

국제 연맹의 감독 아래 백만 명 이상의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를 떠나도록 강요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수천 년 동안 그리스어를 썼던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과 양국 정부는 이주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심지어 ‘귀향’이라고 미화하기 조차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이분법적 기준으로는 맞지 않는 경우의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튀르키예 중부 카파도키아에 살던 그리스 혈통에 튀르키예 언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은 강제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크레타 섬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도 섬을 떠나도록 명령받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선조가 최근에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어서 그 후손들은 다시 그리스 정교로 개종하고 남기를 원했으나 그리스 정교가 이들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1천 명 정도가 강제로 추방당했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로 이주당한 사람들에게는 난민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의 레피제Refugie에서 왔는데 17세기말 영국 또는 다른 나라로 도피한 박해받는 프랑스인 신교도들을 처음 일컫는 단어였다. 이 말은 다시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잔혹행위로부터 도피한 벨기에인을 지칭하였다. 국제연맹은 프랑스, 네덜란드,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도망친 훨씬 더 많은 난민들이 존재했지만, 러시아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만 돕는 것으로 <난민고등법무관>의 역할을 한정시켰다. 1950년 <난민고등판무관>으로 승격되고 난민의 범위가 ‘유럽’으로 넓어졌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난민의 자격은 극히 제한적이다.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두려움’이 인정되어야 한다. 가난, 기아, 기후변화 또는 자연재해로 인한 이주민은 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난한 나라에서 유입되는 노동자에 대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문제도 있다. 막스 프뤼시라는 스위스 작가가 한 말이다.

우리가 원한 건 일손이었는데 사람이 왔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일을 할 손을 원하는 부자나라 사람들은 그 손을 더 손쉽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들을 고안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매디슨 그랜트라는 사람의 연구와 제안을 받아들여 존슨 하원의원이 통과시킨 <비상쿼터법>이었다. 유럽에서 미국대륙으로 건너오는 이민자 수를 매달 상한선을 정하고 선착순으로 끊는 법이었다. 그 법 때문에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는 엘리스섬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유럽에서 입국 희망자들을 가득 싣고 온 배들이 새로운 달이 시작되기 전 자정이 되면 브루클린과 아일랜드 사이에 그어진 가상의 선을 가장 먼저 넘기 위해 '자정의 레이스'를 시작하는 희극적 광경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이 법안은 나중에 개정되어 입국자를 결정하는 권한이 각 나라에 주재하고 있는 미국 대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한국과 관련하여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법안은 미국이 멕시코의 계절노동자를 통제 하기 위해 만든 <브라세라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멕시코인들은 미국이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때에는 그 노동력의 주 공급자였다. 흑인들이 남부의 노예노동에서 해방되어 서부로 떠난 뒤 그 빈자리를 메꿔주었다. 미국의 경제가 불황일 때에는 가차 없이 추방당했고 다시 노동력이 필요해지면 슬그머니 용인되었던 편리한 존재였다. 1940년대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전시 경제를 가속화시킬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미국과 멕시코 정부 사이에 이주노동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미국으로 유입되는 멕시코 노동자의 흐름을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주로 농장이나 철도에서 일할 젊은 남성 노동자를 멕시코 당국이 선발하여 보내도록 했다. 단기 계약 노동자들로 가족의 이주는 허용되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이들의 계약기간이 짧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는 데 이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되었다. 대규모 고용주에게는 계약 조건에 따라 파업이 금지된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필요한 기간 동안 공급해 주었다.

브라세로들은 양국 정부의 보호 아래 합법적으로 미국에 들어와 일할 수 있다는 점, 어느 정도 보장된 급여 수준, 숙소와 식사가 해결되는 등의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정해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고용주한테 폭행을 당하거나 식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등 문제점들이 있었다. 무엇 보다 이들은 마을이나 유흥업소, 여자들과의 만남이 제한되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기숙사에 거주해야 했다.


이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는데 멕시코의 노동력을 감당하기에는 미국 고용주들의 규모나 유연성이 충분하지 못했고, 북으로 이주하려는 멕시코 청년들의 욕구를 채우기에도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라세라 프로그램이 운영되던 22년 동안 수백만 명이 국경을 넘어 오히려 불법이주가 급증했다. 이 시기를 ‘웻백wetback’의 시대하고 부르는데 리오그란데 강을 헤엄쳐 미국으로 온 ‘불법’ 이민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프로그램이 실패한 이유는 이 프로그램에 대한 장미 빛 광고가 성공에 대한 멕시코 젊은이들의 꿈을 현실성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어 불법이민을 부추겼을 것이라는 진단이 하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프로그램에 대한 관리의 부실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차라리 웻백이 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각종 외국인 노동자 정책도 이러한 실패의 길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독일의 이주 노동자 정책을 더 참고하기를 바란다.

브라세라는 1960년대에 종료되었으며 멕시코 이민에 대한 연간 상한선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멕시코인들은 여전히 무단으로 국경을 넘고 있고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불법 이민자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도, 가까이로는 트럼프의 온갖 방비책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입국 시도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이주민의 문제를 인류의 오랜 이주 역사라는 맥락에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고대 이주민들은 현대인들이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일들을 감수해 왔다. 그들은 육지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채 카누를 저어 깊은 대양으로 나갔다. 아니면 먼 대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무서운 육식동물이 돌아다니는 전인미답의 광야를 건넜다. 오늘날에는 숨구멍도 없는 화물선 컨테이너에 숨거나 비행기 랜딩기어에 숨어들 거나 냉장 컨테이너에 숨어 대양을 건너기도 하고 대륙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동기가 단순히 기아나 빈곤, 자연재해, 박해에서 벗어나 안전한 집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는가? 주요 동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많은 브라세로들이 인터뷰에서 ‘모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것이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국경 수비대를 따돌리고 제한된 자원에 의지해 국경을 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남아 언젠가는 가족을 부양하고 자기 자신의 성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이들을 움직이는 커다란 동기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는 또한 ‘독립’이라는 개념이 ‘모험’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보수적인 문화와 가족의 통제를 벗어나고, 부모처럼 되지 않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독립을 선택해 왔다.


우리는 이주민으로서의 인류의 공통된 역사가 왜 그리 무시되었는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이주에 대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은 결정적으로 2차 대전이 그 분수령이다.

전쟁 전이나 전쟁의 와중에 ‘이민자’ 하면 미국, 호주로 이주해 간 유럽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 당시 그들은 ‘이민 나가는 사람emigrant’, 혹은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민을 일컫는 ‘국외거주자’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주로 백인 유럽인을 가리켰다. 지금 이민자를 호칭하는 Immigrants는 ‘이민 들어오는 사람’, 유색인을 분류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대의 이주 논쟁은 인종 차별적이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마치 그리스 아테네 인들이 자신들만이 그 땅에서 솟아 나왔기 때문에 그 땅의 원주민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마치 프랑스, 영국의 백인 조상이 시초부터 그 땅에 살았다고 주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정주주의, 인종적 순수성주의, 민족국가주의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미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땅에 선을 긋고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안에서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강제한 국민국가는 그 이념과 현실이 실상은 매우 다르다. 현재 지구상의 어떤 지역에도 이주민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곳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종교로 만들어진 나라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념을 근거로 그어진 국가 간의 경계-국경은 현대의 <여권> 제도에 의해 더욱 공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 이동의 자유에 커다란 불평등과 차별을 부여하는 수단이 되었다. 소위 여권지수라는 것이 이러한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깊고 근절할 수 없는 불평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이나 캐나다의 여권지수는 매우 높아 많은 나라에서 환영받는다고 하니 나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난한 나라의 여권을 가진 사람들이 미국 등의 나라에 입국할 때 받는 부당한 대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다.

1914년 이전에는 사람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여권이라는 것이 필요 없었다. 한 나라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에 보내는 편지 한 장이면 족했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각국은 인구 이동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고 여권은 전시 스파이 방지, 탈영자, 반역자 색출을 위한 새로운 인프라의 일부가 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은 여권 없는 완전한 이동의 자유를 지향하는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하고 파리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회의의 결과는 정반대로 여권의 기능과 형식에 대한 국제적 합의와 일관성을 규정한 표준화된 새 여권의 도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여권의 신분증화가 이뤄지고 여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매일 여권이 상징하는 이주의 자유의 불평등과 마주친다.


21세기 유목민의 비율은 지난 만 이천 년 동안 100%에서 1%로 줄었다고 한다.

유목민은 대체로 영구적 주거지가 없는 사람들로 연민과 무시와 불신이라는 복합적 대접을 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들과 다르게 새로운 유목민이 탄생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디지털 유목민, 회색 유목민 혹은 스노 버드snowbirds (태양을 따라 더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부자나라 노인들), 소위 글로마드Glodmads라고 불리는 화려한 방랑객들, 궁정을 오가며 사는 왕족들. 미국에는 한편 캠퍼밴에 살며 떠도는 계절노동자들(영화 노마드랜드의 주인공들)도 있다.

21세기 유목민은 집 없이 떠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개인 제트기를 타고 화려한 저택 사이를 오가는 부자들을 다 포함하는 단어가 되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누군가는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가?

세계가 부를 중심으로 분할된 작금의 방식은 정당한 것인가?

유목민이 한 때 사냥과 채집, 가축을 먹이기 위해 자유롭게 드나들던 땅에 누군가가 선을 긋고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동의 자유를 금지시킨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는 없는가?

한 곳에 정착해 그 땅과 경작의 결과물을 소유하며 사는 삶보다 세계를 옮겨 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삶이 덜 물질적이며 덜 스트레스받는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정체성이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스스로 자신이 속하고 싶은 정체성을 선택하는 자유는 불가능한 것일까? 두 개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래 하나의 혈족이며 친족관계로 맺어진 존재가 아닌가?


저자는 전쟁과 영웅, 제국의 흥망성쇠 역사 속에 잊히고 숨겨진 대다수 이주민의 발자취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이러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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