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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그라스를 땋으며

오래된 과거가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by 다정한 세상

한국에서 윤석열이 파면되는 것을 보고 안도하면서 얼마 후 캐나다 집으로 돌아왔다. 파면이 곧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었지만 윤과 그의 지지세력들의 끈질긴 저항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저항과 그들을 부추기거나 이용하는 소위 지도자라는 자들의 행태를 듣고 볼 때마다 마음속에 또 다른 분노와 절망감이 쌓여갔다. 그래도 대다수의 대한국민들은 놀라운 이성과 절제로 모든 방해공작을 무력화시키고 원하는 대통령을 선출하고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착실하게 내딛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가슴에 놓인 무거운 돌덩이가 좀 치워지는 듯했는데 더 크고 무거운 돌덩이가 다시 마음을 짓누른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을 극단적인 고통의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는 극우적 파시스트 세력이 힘을 뻗지 못하고 자유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에 이어 유럽의 전통적 민주 정부들이 극우세력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위험에 처해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세계 최 강국이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 직접 뛰어들어 명분 없는 폭격을 가해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못하는 국제적 현실도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이란과 이스라엘의 정전이 발효된 잠깐 사이에 이스라엘은 다시 가자 지구의 난민들을 향해 폭격과 총격을 가했다는 뉴스에 이르면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 하는 절망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굶주리고 병든 가자지구 난민에 대한 생필품의 보급을 막고 있는 이스라엘이 겨우 허용한 미국의 구호식량을 받으러 몰려든 난민들에게 너무 일찍 왔다는 이유로, 통제벽을 넘었다는 이유로, 보급 시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총을 난사해 수천 명이 죽고 다쳤다는 보도에 이르면, 인간의 사악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짐작도 하기 싫다. 하물며 이스라엘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죄악에 기반하여 국가 설립의 정당성을 주장해 세운 나라가 아닌가.

팔레스타인인들은 구약시대 피를 나눈 형제였으나 이웃 강대국의 침략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유대인 순혈주의를 주장하며 고향 땅에 남아 살고 있던 동포들이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지 않았다고 배척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이다. 예수가 사랑하고 동정했던, 예수의 고향 사람들, 가나안 사람들이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 옛날 배제와 핍박으로 상처를 준 동족들에게 무자비하게 총탄을 퍼부어 말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와 기억은 어디까지 왜곡되고 얼마나 편리하게 망각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광주민주항쟁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는 시도를 철저하게 막아야 하는 것은 단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파시스트들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투쟁의 기록의 일부이며, 세계인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은 것도 이런 세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집에 돌아온 뒤 두어 달 동안 책이 잘 읽히지 않았다. 가슴속에 쌓이는 슬픔과 절망이 책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했다. 대신에 아침저녁 한 시간씩 뜰에 나가 일을 했다. 그림자가 지는 구석을 따라 움직이며 쭈그리고 앉아 한국에서 공수해 온 낫과 호미로 허리까지 자란 잡초들을 뽑고 웃자란 잔디를 베어 한 뼘씩 한 뼘씩 뜰을 정리해 나갔다. 비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하다 보니 인내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허리 통증도 점점 심해졌다. 그 대신 잔디 깎는 기계로 미는 것에 비해 내가 좋아하는 예쁜 풀들은 살리고 원치 않는 풀들은 뿌리까지 제거해 내년에는 좀 덜 번성하겠지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일을 했다. 사실 무거운 기계를 잘 다룰 체력이 안 되는 것도 이유가 되었다. 앞과 옆 뜰은 내 사정을 아는 착한 이웃 두 분이 잔디 깎는 기계로 밀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언제나 필요하면 자기들에게 말만 하라는 이웃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지옥인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눈물 흘리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우리에게 이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을까? 어디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인간이 걸어온 과정을 통해,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지식과 기술을 통해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 비록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나 보장은 없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이 문제를 바라보고 우리에게 귀 기울여 주기를 청하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함께 느끼며 동시에 깊은 위로와 희망을 느끼게 해 준 책을 소개한다.


한국어로 <향모를 땋으며>로 번역된 <스위트그라스를 땋으며 Braiding Sweetgrass>라는 책의 저자 Robin Wall Kimmerer는 식물학자, 생태학자이며 인디언 원주민 포타와토미족Potawatomi의 후손이다. 이 분의 책 중 하나인 <이끼와 함께>를 한강 작가가 아버지에게 추천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가장 최근 나온 책으로는 <Serviceberry>라는 책이 있는데 찾아보니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출간되어 있다. 어떤 책을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로빈은 식물과 자연 생태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망가진 자연과 더 나아가 세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실천하는 행동가이며 사상가이다. 그녀의 책은 자신이 연구하는 모든 생명체와 인간의 관계를 원주민 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고, 망가지고 분열된 세상을 하나의 온전체로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담고 있다.


식물학과에 입학하려는 동기를 묻는 면접관에게 황금색 꽃대를 가진 골든로드와 그 주변에 늘 같이 피는 보라색의 아스터스가 왜 그런 색의 꽃을 피우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다고 대답하자 교수는 너는 과학자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로빈의 글은 단순한 과학적 저서가 아니라 아름답고 감동적인 수필을 읽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산책길에 가을이면 황금빛 휘장을 어깨에 맨 병정들처럼 양쪽에 도열해 서 있던 키 큰 황금색 꽃이 골든로드라는 것을 알았다. 또 숲길 한쪽 작은 습지에 가을이면 검붉은 꽃대를 올렸다가 겨울이 다가오면 하얀 목화송이를 다는 키 큰 풀이 캣테일Cattail이라는 식물인 것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이 캣테일은 버릴 데 하나 없는 식물이었다니. 원주민들은 줄기는 껍질을 벗겨 아삭하고 시원한 속살을 오이처럼 먹고 비타민이 풍부한 꽃대에 핀 분가루는 케이크나 빵 위에 뿌려 장식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뿌리줄기는 캐서 전분을 내어 빵을 만들고 하얀 솜 송이들은 모아 방석이나 베개 속으로 쓴다는 것이다. 그저 무심히 지나쳤던 존재들이 갑자기 내게 친구처럼 다가오는 바람에 산책길이 한결 즐거워졌다.


로빈은 현대사회의 소비적이고 상업주의적 경제활동이 불러온 재앙들로부터 세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원주민들의 여러 가지 사상을 그들의 전통적 설화들을 통해 설명한다.

몇 가지 중요한 사상을 보자면 우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살아있는 생명이며 그 존재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영어는 인간 이외의 모든 다른 것은 “것it”으로 규정해 인간 중심적 세상을 만들었고 생명들의 불평등을 당연시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 언어는 대부분의 명사를 동명사화해서 식물과 동물뿐만 아니라 물과 바람, 바위도 하나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 취급하는데 이런 언어가 생태계에서 인간의 어떤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존재는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사상을 “세상 모든 존재들의 민주주의Democracy of all Beings”라고 부른다.


또 다른 중요한 사상은 자연이 주는 모든 것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선물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고마움을 표현하고 다시 갚아야 한다. 사랑을 주고 갚는 이 과정을 원주민들은 “주고받는 관계-호혜적 관계reciprocity”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받은 것을 감사하고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자연을 잘 돌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감사를 표현하는 원주민 의식은 자연이 준 선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겸손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돌려주는 행동-돌봄의 행동을 통해 완성된다. 정성을 다해 가꾸고 추수하고, 거둔 것은 낭비하지 않고 다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주고받는 관계이다.


이 책은 또 하나의 <오래된 미래>로 치부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얘기지만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고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픈 AI나 구글 같은 공룡기업들이 원래 약속과 다르게 인공지능을 군사목적으로 적극 활용하는데 동의하고 미국정부와 함께 공동 연구에 들어갔다는 무시무시한 소식도 들린다. 우리는 그 거대한 권력과 대항할 만한 힘이 없다.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가?


과학적 지식과 원주민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두 딸의 어머니인 자신의 개인적 경험으로 색깔을 입힌 바구니처럼 이 아름다운 글에는 꺼지지 않는 사랑과 희망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군대의 탱크 앞에 모였던 순결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팔레스타인에서 무시무시한 폭격과 총알을 피해 아이들을 구하고 치료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고 일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한없이 슬프고 무력하지만 로빈의 고백처럼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라도 해야겠다.

아래 글은 이 책의 한 부분을 일부 발췌해서 번역한 것이다. 그녀가 나의 절망과 슬픔에 너무 깊이 공감하면서 또 한 가닥 희망의 문을 열어준 것 같아서.


[이 인용은 산란기를 맞은 도롱뇽들이 숲 속 축축한 통나무 밑 서식지를 떠나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건너 알을 낳을 늪지대로 돌아가는 시기에, 그들이 자동차에 밟혀 죽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도롱뇽 구출 작전에 나선 어느 날 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날 로빈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뉴스를 보며 무력함에 빠진다. 폭탄이 떨어지는 것도 막을 수 없고 차들이 이 길을 속도를 내어 달려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이런 것들은 내 능력 밖의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도롱뇽들을 집어들 수는 있다. 하룻밤이라도 나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무엇이 어두운 밤 우리를 이 외로운 공터로 이끌었을까? 아마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도롱뇽들로 하여금 통나무 아래 그들의 보금자리를 떠나 이 길에 나서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우리는 오늘 밤 죄의식으로부터의 사면을 받기 위해 이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간 때는 늦은 밤이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 뒤 언덕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안갯속에서 들린다. 하나의 단어가 마치 영어로 말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린다.

들어주세요! 들어주세요! 들어주세요! 당신들이 불가피한 희생자라고 말하는 우리가 당신들의 풍요로움이며 당신들의 교사이고 안전판이며 당신들의 가족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당신들의 이상한 욕망이 다른 창조물에 대한 죽음의 선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들어주세요!”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개구리가 외친다.

“들어주세요!” 고향을 떠나 먼 곳까지 온 한 젊은이가 탱크 안에 갇힌 채 소리친다.

“들어주세요!” 집이 불타버려 폐허가 된 자리에서 엄마가 소리친다.


이 모든 것을 멈춰야 한다.

스위트그라스를 태워 이 깊은 슬픔을 짙은 연기 속에서 씻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안개는 너무 무겁고 성냥은 붉은색 줄만 남기고 꺼진다. 그렇다. 오늘 밤에는 이 슬픔을 씻어낼 방법이 없다. 물에 잠긴 코트를 입듯이 슬픔을 감내해야 할 밖에.


울어요! 울어요!” 물가에서 두꺼비가 외친다. 그래서 나는 울었다. 만약 슬픔이 사랑으로 향하는 문이라면 우리 모두가 울게 내버려 두자. 우리가 부수고 찢어놓은 세상을 위해 그래서 세상을 온전한 하나로서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돌려놓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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