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도망쳐 다시 시

essay 에세이

by 로움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中 눈사람의 봄날> 박서영 시인

하나, 둘 사 모은 시집이 100권이 넘었을 때, 나는 시집 사는 행위를 중단했다. 같은 출판사의 시집끼리 열 맞춰 정리할 때의 희열, 무수한 표현들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낯설었던 시인들의 이름이 반가워지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시에 빠지게 되었다. 대게 시집의 가격은 만원 남짓인데, 이 가격은 시집을 구매하게 하는 매리트가 있었다. 내 계산법은 시집 한정으로 특이했는데, '시집 열 권 = 부산과 서울 왕복 KTX 표 값이네.', 'PT1회에 시집 무려 5권!' 이런 식이었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나에게 그 어떠한 가치보다 시집의 가치가 커 보이게 하는 계산법이었던 것이다.


한때는 중고 서점의 매력에 빠져, 보물찾기 하듯이 시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절판된 시집을 사거나, 사고 싶었던 시집을 싼 가격에 샀을 때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그렇게 책장은 시집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위기의식을 느낀 건 내가 아닌 책장이었다.


3단으로 된 책장 2개가 시집으로 채워지고, 더 이상 틈이 없어 책 위에 책을 쌓아 정리하게 되었다. 책을 꺼내려면 손톱이 꽤나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친구들에게 시집을 나눠주고 새로운 시집을 사며 책장 생태계는 그런대로 순환되고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위기는 금방 찾아왔다. 이미 있는 시집을 또 구매해 버린 것이다. 집에 있는 시집을 다시 샀다는 건, 그 시집을 읽지 않았거나 샀다는 사실마저 잊었다는 것이다. 물론,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 당시에 나는 친구들에게 시집을 나눠주며, 시집을 사랑하는 이미지, 문학소녀의 이미지가 되어있었고 그것에 꽤 만족을 하고 있었다. 처음 시에게 위로받았던 마음보다, 시를 읽는 나의 모습에 빠지면 빠졌달까. 그런 내 모습을 직면하자, 나에겐 시집 100권이 주는 의미는 숫자에 불과해, 무색해졌다.


그 이후로 2년이 지났다. 간혹 읽고 싶은 시집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고,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량도 줄었던 터라 내 인생에서 시의 비중은 그전보다 확연히 작아지게 되었다.


얼마 전, 위로를 받고 싶은 순간이 있었다. 지구에 '나'라는 행성이 있는데, 너무 고요해서 차라리 다른 행성과 충돌해버리고 싶은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스스로에게 미안함.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마음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는 그때, 시가 생각났다.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도, 장소도, 동물도 아닌 시가.


나는 퇴근을 하자마자, 박서영 시인의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라는 시집을 꺼냈다. 시집은 2년 동안 책장 안에 있으면서 먼지가 쌓여 책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는 예의를 갖춰 시집을 열었다. 2년 전에 나는 이 부분을 감명 깊게 읽었구나. 그때 당시 접어 놓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나는 그때를 추억하며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눈사람의 봄날>이라는 시에서 멈춰 섰다.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


이 한 문장이 가슴에 훅 들어와 박혔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다른 행성과 충돌하고자 했던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쓸모없이/소중하고/궁핍한/기억. 나는 그 기억들로 만들어진 행성이구나.

시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 기억들이 너를 지탱하고 있어. 그 기억들로 넌 살아갈 수 있어. 나는 시의 위로에 불안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페이지의 모퉁이를 접었다.


어떠한 이유로 시를 멀리 하게 되었든, 시는 다시 찾아온다. 그게 형상이 되었든, 기억이 되었든, 문장이 되었든. 시는 그런 힘이 있다. 나는 언젠가 접어놓은 페이지를 다시 열 것이다. 시가 가진 그 힘을 믿고 싶다.


시에서 도망쳐 다시 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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