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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1

1215

by 로움


1.

나의 아빠는 혈압이 높아 겨울 산에 갈 때엔 모자를 써야 했다. 그것은 유전이 될 확률이 꽤나 높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패딩 모자를 푹 눌러쓰고 뚝길을 걷고 있었다.


평일 저녁시간에 산책을 하는 사람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의 발걸음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들의 발걸음을 통해 답을 알 수 있었다.


운동을 하기 위해 걷는 사람은 무겁고 일정한 보폭으로. 수다를 떨기 위해 걷는 사람은 가볍고 불규칙한 보폭으로 손동작과 함께. 통화를 하기 위해 걷는 사람은 여유롭게. 데이트를 하는 연인들은 하늘 위를 걷듯. 저마다의 사연으로 추운 날씨에도 뚝길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걸음에도 속하지 못한 나는, 빠르게 걷자. 뭐라도 더 하자. 피곤해지자. 했다.

머리가 명령하자 몸은 기꺼이 명령을 따랐다. 운동을 하기 위해 걷는 것처럼 위장을 하고는.


적전지에서 소리를 지르며 전투하는 병사보다, 적군의 부대에 위장하여 들어간 병사의 숨소리가 더 거칠었을 것이다. 아우성을 삼킨 것이니.


나든 남이든 속이는 일은 벅차기 마련이다. 거친 숨과 마스크 탓에 안경에 김이 서렸다. 마스크 턱 쪽을 살짝 들어주자 찬 공기가 들어와 앞이 보였다.


꼬리가 보인다.

흰 꼬리가.


작은 몸으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꼬리와 엉덩이가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적군의 초소를 지나가다 발걸음을 늦춰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


강아지의 보폭에 맞춰 잠시 걸음을 늦췄다.


2.

내 사연은 이렇다. 1. 오늘 세 통의 전화를 받았고, 2. 친구들은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신과 발신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은 상태.


소통의 불안상태.


처음 걸려온 전화는 02로 시작되는 스팸전화였다. 평소라면 거절을 했을 나지만,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아버렸다. 방심했다. 건너의 사람이 기계라면 끊어버렸을 테지만, 사람이었다. 그는 대출, 보험, 카드 추천과 같은 말을 했겠지만 나는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빠서요. 뚝-

두 번째 전화는 동생이었다. 애인과 다툰 언니의 기분을 파악하려 하는 전화였을까, 그녀는 피곤할 텐데도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던졌다. 시답잖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눴다. 기억에 남는 말은 "언니는 성격이 고약하니까 착한 사람 만나야 돼."였고, '고약'이라는 표현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세 번째 전화는 부동산이었다. 3월에 계약이 만료되니, 계약 연장을 할 것인지 나갈 것인지 정하라는 말을 했다. 3월까지 계약인데 벌써부터 닦달인가, 싶은 마음이 들어서 짜증이 났다. 조급했기 때문에 짜증이 났다.


친구 A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친구 B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그들도 사연이 있겠지. 그들도 어디선가 걷고 있겠지. 각기 다른 발걸음으로.


3.

흰 꼬리는 지칠 줄을 모르고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내일 사료를 벌러 나가야 했으므로 꼬리는 타의적으로 집에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꼬리는 신이 나있다.


그럼에도 신이 나있다.

'아, 강아지처럼 위장을 해야겠다.'


이유 모를 답답함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섯 통의 전화에 대해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생각하지 말자.


단순하게.


강아지처럼 걷기 시작하자, 더 이상 숨이 차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을 신나게 걸었다.

꼬리를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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