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에 가시가 제대로 박혔다. 집게로도 빼보고 손톱깎이로도 그것을 노려봤지만 손톱 사이에 박힌 그것이 아주 작아서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손톱을 아주 짧게 잘라버리자 마음을 먹었다. 아주 짧게, 정말로 아주 짧게. 한 번에 성공하자는 마음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며 손톱을 잘라냈다.
불편함은 손톱이 사라진 자리에 남았다. 머리를 감을 때, 물건을 집을 때, 계란을 깔 때, 특히 연속으로 타자를 칠 때가 그러했다. 내가 오늘 저녁 공연을 앞둔 피아니스트였다면, '앙코르 무대는 하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했으리. 손톱에 보호받던 속살이 세상에 나와 불규칙적인 것들과 접촉했을 때, 그 느낌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음. 긍정적인 단어는 보기에 없다.
내 주위엔 착한 사람들만 있다. 나에게 착한 사람. 그래서 수가 많지 않다.
친한 사람이라도 선을 조금이라도 넘으면 관계를 정리했다. 아주 단호하고 냉혈한 표정을 하고는. 딱. 딱. 딱. 그건 손톱을 자르는 일과 같았다.
되돌릴 수 없는 일
그건 아프긴 한데 나름 괜찮아.
20대 초반, 나는 자주 찔렸다. 가시는 일상에 도사리고 있었다. 안전하다 여기던 곳에서 찔리면 더 깊게 박혔다. 방심하지 말자. 방심하지 말자. 했다. 가시를 빼보려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찔리고 찔려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난 치료법이 아닌 예방법부터 찾았다. 다친 것을 고치는 것보다 다른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기에.
예방법은 두 가지였다. 1. 가시에 찔리지 않기 2. 가시가 박히면, 손톱을 잘라내기. (넘어지지 않는 법 = 1. 누워있기 2. 앉아있기와 같은 말 같지만, 이 둘 모두 안전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예방법을 실행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다 다른 것과 충돌하기도 하고, 한 번에 손톱을 잘라내지 못해 덧나기도 했다.
짧아진 손톱에 적응을 하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 손톱에 박혔던 게 머리카락인지, 속눈썹인지 복숭아 털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타자를 친다. 굳은살이 생기거나, 새 손톱이 자라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하고. 나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