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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연 Sep 25. 2022

길이 있었다

고요히 내려앉은 햇살 사이로

길은 있었다


숲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원래 둘이었는지

하나였다가

다시 갈라졌는지

모를 길들에

나는 결국

길을 잃었다


두서없는 걸음들이

작은 샛길을 만들기도 하고

작정하듯

풀숲을 헤치며

기어코

길을 찾고야 말겠다고

온몸에 상처를 내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길은

가야 할 곳으로

처음부터

나지막이 앉아있었다


조용히 바라봄

내 시끄러운 욕심이 만든

덤불을 걷어낸

그 자리에, 거기

길이 있었다



어느 모임에서 "혹시 성장할 때의 환경 탓에 지금  현재의 삶에도 영향을 받는 게 있느냐"는 물음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있다고 했다.

나는 가정폭력이 있던 집에서 자랐고 아픈 언니가 있는 집에서 유년을 보냈다.

어떤 때는 가정폭력에 꼼짝없이 웅크린 채 두려움을 갖고 살았던 적도 있고 어떨 때는 닮지 말아야지 맹세했던 부분에서 부모와 비슷해진 상황을 보며 절망하기도 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유년의 환경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 경우는 폭력보다 아픈 언니의 삶에서 더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삶이 주어지는 방식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갖고 살았었다. 왜 누구는 자유롭게 살아갈 육신을 주시고 어떤 이는 한순간에 자기 손으로 밥도 못 먹게 모든 것을 앗아가는 건지 궁금했고 화가 났다. 연민은 책임감이 됐고 능력이 부족함을 알았을 땐 죄책감으로 다가왔었다.

죄책감은 삶의 모든 것들을 무겁게 했다.

웃는 것도,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내 것이 되기엔 너무 가볍고 보드라운 것처럼 느끼던 시절을 겪고 난 후 내가 느낀 건 그 모든 게 내 삶의 무게를 견디지 않으려는 자의 핑계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나에게만 불행,

나에게만 고난..

이런 것들 속에 나를 숨겨두고 주어진 하루를 허투루 보낸 것에 대한 변명거리를 찾았었던 건 아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국 환경이라는 것도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에 따른 부차적인 문제인 건 아닐까?

유년의 환경이 나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현재의 내 삶이 그것 때문에 불행하거나 행복한 건 아닌 것 같다.


오늘의 나는 내가 충실하고자 마음먹은,

그만큼의 삶을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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