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기쁜 우리 늙은 날

by 이혜연
기쁜 우리 늙은 날

내일은

오늘의 징검다리 끝자리


집을 잃은 숲 속의 아이들처럼

빵조각을 길잡이 삼아

돌아가려 한다면


지나가는 늑대가 집어먹고

날아가던 새들이 쪼아 먹어

다시 길을 잃고 말겠지


오늘을 단단하게 세우고

내게 주어진 약속을 굳게 지키며

돌처럼 단단한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놓지 않으면


어쩌면 다시는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젊었던 날들, 모두 새에게 쪼인 채


기쁜 우리 늙은 날

아름다운 석양을 맞이할 수 없으리.



새벽 4시 10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과 아침 일찍 미술관으로 가자고 약속해 놓은 탓에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일어나 그림을 그리는데도 연신 등줄기에 뜨거운 땀이 흘러내립니다. 창을 열면 좀 나을까 해서 활짝 열어보았지만 텅 빈 거리, 묵직하고 텁텁한 열기가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건지 바람 한 점 없는 거리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맞바람이라도 불어준다면 숨 쉬기가 조금 쉬울 것 같은데 펼쳐 놓은 종이들마저 들 힘이 없는지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한 해 한해 커가는 아이들만큼 저 또한 해마다 조금씩 체력이 떨어지는 걸 느끼곤 합니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날씨에는 온몸의 땀구멍이 열려 버린 듯 힘든 시간이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서둘러 그림을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으로 가서 전시를 관람했는데 큰 아이가 컸다고 제법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에 대견함이 몰려왔습니다. 엄마와 함께 전철을 타고, 함께 그림을 감상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달콤한 후식까지 먹은 아이들의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제 손을 잡으며 "엄마, 오늘 진짜 행복해요."라고 말해주는 순간 저 또한 감사함과 행복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지치게 했던 땀도 가라앉고, 주저앉어버릴 것 같던 무릎에도 힘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오늘도 잘 살았구나, 안도하게 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당에서 자라난 등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