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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축제

by 이혜연
가을 축제

계란 동동 뜰 때까지 소금을 집어넣고

속이 꽉 찬 배추 반으로 갈라

하루를 푹 재우자


무, 생강, 마늘, 양파로 감칠맛을 내고

잘 삭여둔 액젓으로 간을 맞춰


마당에 커다란 멍석 깔고

가마솥에 돼지고기 삶고


대문을 열고

다 큰 딸내미와 귀한 며늘이 들 들어오면


잘 절여진 배추 속을 꽉꽉 채워

겨울을 나보자


갓 버무린 김치를 쭉쭉 찢어

잘 삶아진 따뜻한 돼지고기에

대문 밖 세상에서 아팠던 것

슬펐던 것, 힘들었던 것 모두 다 둘둘 말아


배가 따뜻해질 때까지 함께 나눠 먹으며

마지막 가을 축제를 즐겨보자



고된 김장이 축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담장 너머 누구네집 식구들 모두 모여 함께 김치를 담그는 모습만으로도 괜스레 샘이 날 때가 있습니다. 구심점을 하던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형제는 모두 각자의 계획대로 살아갈 뿐 함께 모여 어떤 것들을 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김장은 친구네 어머니댁에서 잔치처럼 해냈습니다. 친구와 여동생 친구들, 친구의 작은 집까지 모두 모여 밥도 먹고 갖가지 재료에 함께 속을 채워 놓고 마당에 줄지어 각 집으로 가야 할 김치 부대를 보자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면 언제든 고아가 된다는 말이 이런 축제의 날들에 항상 떠오르는 걸 보면 아직 철이 들기는 멀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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