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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것들

by 이혜연
흗들리는 것들

요 며칠 버려진 것들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날들이었다. 햇살이 따스해도, 살갗에 닿는 온도가 그렇게 차갑지 않더라도 날카롭게 할퀴어대는 바람 앞에서는 두툼한 무장도 소용이 없었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어봐도 온몸으로 냉기가 스며든다. 사방이 사나운 바람에 둘러싸여 요란하게 울어댔다. 그리고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빈 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쓰임이 다한 것들, 잊힌 이야기, 말하지 못한 마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이 비명을 지르며 흐트러져갔다. 하지만 바람이 있지 않았다면 억지로 끊어내야 하는 결심을 어느 누가 쉽게 할 수 있을까. 미련이 될 수도 있고 아쉬움과 죄책감, 그리고 다시 매달리고 싶은 인연들을 우리는 쉽게 떼내지 못하고 깊숙이 숨겨둔 채로 놔두다가 안에서 무르고, 곪고, 악취를 풍기기도 한다. 그렇게 얼굴에 슬픔을 새기고 응어리진 가슴속으로 아픔을 삭이다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순리대로 오는 고통이 새로운 가지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아픔이 남기고 간 생채기에 새살이 차오를 때쯤에 우리는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흔들린다는 것은 때로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고, 뿌리를 더 깊게 박고서 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응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를 뒤척이게 했던 바람의 날들이 지나간 후에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을 맞이하게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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