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까먹는 타입

부창부수라고 해야 할까요?

by 알로

남편이 친구들과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녀왔습니다. 큰아이가 수행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온 것입니다.


남편은 일행들과 함께 미나리에 삼겹살을 든든하게 먹고 불룩한 배가 방해가 돼서 그랬는지 정성을 들이느라 그랬는지 험한 산을 네 발로 기어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빈다는 말의 의미를 몸소 실천하고 온 남편의 노력이 가상합니다.


오늘 아침 모처럼 큰아이와 작은아이까지 다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자신의 희생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었던 남편이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절에 갔더니 서울대 합격을 기원한다는 소원지가 엄청 많이 붙어 있더라고. 세상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가 봐.


큰아이의 표정이 약간 안 좋았습니다.


누구 딸 예원이는 해외에서 국제학교를 오래 다녀서 영어를 되게 잘한다더라. 그래서 학원을 하나도 안 다니는데 늘 영어가 1등급이 나온대.


큰아이가 한숨을 쉬면서 뭐라고 작게 말하였는데 무서워서 차마 다시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뒷부분의 이야기만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예원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는데 그런 친구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아니야, 예원이 되게 착해. 엄마는 예원이 좋아. 혹시 아니? 나중에 둘이 결혼하게 될 수도 있잖아. 드라마에 나오는 정략결혼 같은 거 생각해 봐.


방금 이 말은 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큰아이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샌드위치로 식사를 마친 아이가 자기 방으로 스르륵 사라졌습니다.


늦게 일어나서 나중에 식탁에 앉은 남편이 자기 접시에 놓인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 감탄을 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샌드위치 만든다고 서두르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로 싱크대에서 그릇을 정리하던 저는 마음이 좀 누그러졌습니다.


남편을 돌아보았더니 애들 먹으라고 까서 하나씩 쪼개놓은 레드향을 주워 먹으면서 이거 진짜 맛있다. 이게 한라봉은 아니고 천혜향인가?라고 저에게 묻더군요.


그게 맛있어? 샌드위치는 아니고 그게 그렇게 맛있어?


내가 다정하게 미소지으며 묻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한 남편이 남은 샌드위치를 한 입에 털어넣고 재빠르게 자기 방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저는 한숨을 쉬며 그릇을 정리했습니다. 접시를 치우면서 하나 남은 레드향을 입에 넣었더니 과연 너무 맛있어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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