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대뜸 강의실 중앙으로 의자를 가져와 앉더니 말하셨다.
“너희는 가수로서 지금 어디쯤 있는 것 같니? 노래하는 데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이 있어? 한 번 얘기해 봐.”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한 과제를 발표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나를 제외하고는. 예상을 벗어난 이런 수업 전개가 익숙한 듯 à의 말이 정적을 깼다.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무대 위에 홀로 서 있을 때면 너무 무서워요.“
음악적 재능과 사람을 매료시키는 매력을 모두 가진 à는 무대 위에서 차분한 몸짓과 달리 눈빛엔 불안함이 어렸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일지언정 속으론 남들보다 몇 배로 폭풍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 듯했다. 첫 설렘을 잊게 만드는 반복된 연습, 조여오는 현실의 압박 등 모두가 고민을 꺼내놓았고 나도 마음 한 켠에서 고백할 용기가 났다.
“제 목소리는 힘이 없고 고음을 잘 못 내요. 예쁜 외모나 좋은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고요. 그나마 배운 음악 이론은 평범한 틀에서 더욱더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어요. 저는 말 그대로 챠-밍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나온 단어 ‘챠밍’. 오래전부터 대중의 시선이나 마음을 끌 만한 매력이 한 움큼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한 명보다 네 명의 의견이 더 객관성을 가지는 듯 보여서일까?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넘겼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과연 내게 뭐라고 말할까 갑자기 두려워졌다.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여태껏 쌓아왔던 사부작한 이력을 구구절절 읊고 싶었다.
“… 네 목소리를 들으면 가끔은 울 것 같아. …위안을 주고. 진짜로.”
순간 목구멍이 따끔하더니 눈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너의 관객으로서, 이론에 갇혔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어. 착한 성격이 목소리에 드러날 뿐이지”
“첫 녹음 수업 때 너는 우리에게 각자 맞는 키를 바로 알아냈어. 그건 엄청난 거야.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얻은 능력이지.“
시속 800km로 13시간을 날아와 듣게 된 나에 대한 평가는 ‘지금 그대로 괜찮다’였다. 한국에서 나는 늘 부족했다. 처음의 꿈은 작곡가였으나 가사도 잘 써야 했고, 의뢰인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곡을 대신 다 꿰뚫어 본 것처럼 편곡자도 되어야 했다. 다재다능은 내 음악 인생에 방어 기제였다. 당시 친구들의 칭찬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밖에 못 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그날은 프레임 단위로 기억이 난다.
하루는 한 친구가 런던의 첫인상이 어떤지 물었다.
“베리가 많아! 블루베리, 라즈베리, 블랙베리, 크랜베리. 한국에선 거의 블루베리만 있거든.”
대답을 듣자마자 지수는 정말 작은 것에도 신기해하고 무척 좋아한다며 다들 웃었다. 과일 가판대에 가지런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베리도, 지쳐있던 영혼을 회복시켜 준 그날의 칭찬도 내 삶에선 다 생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