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위로
– 박하사탕, 잉모초, 그리고 말 없는 위로
한여름, 아버지는 온열병으로 지쳐 쓰러질 듯한 날이면
텃밭에서 *익모초(잉모초)*를 따 오셨다.
어머니는 절구에 찧어 즙을 내셨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쓴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박하사탕 한 알을 입에 무셨다.
어린 나는 그 맛을 몰랐지만,
그 쓴물이 어른들의 침묵과 인내,
그리고 몸속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회복의 증표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요즘, 내 입 안에도
그 잉모초 맛이 감돈다.
직설적인 말들을 삼키느라
박하사탕 한 알이 절실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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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대신, 박하사탕)
단톡방이 술렁이기 시작한 건
가수 초청을 두고 작은 의견 충돌이 벌어졌을 때부터였다.
중심에 선 그는
오랜 시간 모임을 위해 총무로 궂은일을 도맡아온 사람이었다.
사진을 찍고, 행사 내용을 정리해 올리며
참석하지 못한 이들까지
늘 함께 있는 것처럼 만들어주었던 사람.
그런 그가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과는 기본이지.”
“인격의 문제다.”
“이쯤 되면 퇴출밖에 없다.”
라는 말들이 그를 향해 쏟아지는데도,
그는 침묵 중이다.
퇴장하지도, 해명하지도 않고
그저 ‘방 안에 있는 침묵’으로 남아
수많은 ‘말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나에게도 익모초의 쓴맛처럼 다가왔다.
이 모든 말들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그를 비난하는 무리에 동참해야 할까,
아니면 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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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존재, 로리)
그럴 때, 문득
*스티븐 킹의 단편 「Laurie」*가 떠올랐다.
주인공 로이드는
아내를 잃고 삶의 의욕을 잃은 은퇴 교사다.
그런 그에게 여동생이
작은 강아지 ‘로리’를 보내준다.
처음엔 귀찮아하던 로이드는
점차 로리와의 산책을 통해
삶의 리듬을 회복해간다.
하지만 후반부,
평화롭던 일상에 갑작스런 위기가 닥친다.
산책 도중 익사체를 발견한 로이드는 자신이 범죄의 유일한 목격자임을 직감하고, 곧 살해범에게 쫓기는 상황에 놓인다.
위기의 순간, 로리는 단순한 반려견이 아니라 생존을 이끄는 존재로 돌변한다.
로이드를 향한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는 로리의 모습은
상실의 어둠을 지나 다시 삶의 방향으로 걸어가게 하는 말 없는 힘 그 자체다.
단톡방 속의 우리에게도,
말보다 먼저 필요한 건
기다림인지도 모른다.
말 대신 곁에 있어주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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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어쩌면
어떤 ‘말’보다도 ‘형태’를 더 중시하는 시절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한 해명, 명확한 사과, 옳고 그름의 잣대.
그 모두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쩌면 더 먼저 필요한 건
한때 함께 웃고 애쓰던 사람을
여전히 나의 사람으로 남겨두는 일 아닐까.
공동체는 ‘정리’가 아니라
‘유지’로 가능하다.
그의 침묵이 실망이라면,
그 실망을 견디는 품도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몫이다.
나는 지금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기보다,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림’이라는 침묵의 동참자가 되어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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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박하사탕 한 알을 입에 문다 )
그가 다시
사진 한 장을 단체방에 올려주는 그날을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박하사탕 한 알을 입에 문다.
입 안의 쓴 감정을
천천히 식히며 인내해야 한다.
그가 다시 돌아올 그날,
우리 모두가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어주던 시간을 기억하길 바란다.
말 대신 곁을 지키는 존재의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 침묵이
얼마나 많은 것을 품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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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You Like It Darker』 – Stephen King (2024)
10편의 단편이 담긴 이 책은
삶, 상실, 회복의 무게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스티븐 킹의 최근작.
그중 「Laurie」는
말 없는 존재가 인간에게 어떻게 위로가 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감동적인 이야기다.
작가의 기존 공포 서사와는 결이 다른
따뜻하고 울림 있는 단편으로,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삶을 어떻게 회복시켜주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