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미소, 커튼 너머의 목소리

브라우닝의 시와 메디치의 초상화에서 나의 삶을 읽다

by 운조



영시 읽기 강의 시간에 처음 접한 시가 로버트 브라우닝의 「My Last Duchess」였다. 교재 속 활자를 따라가며 교수님의 해설을 듣는 동안, 나는 오래된 영시 중 하나를 그저 분석하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그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의 첫 구절이 내 마음에 단단히 걸렸다.


“That’s my last duchess painted on the wall,

Looking as if she were alive.”

(“저것은 내 지난번 공작부인을 그린 초상화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벽에 걸린 초상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표정, 그리고 커튼을 걷는 순간에만 드러나는 미소. 강의실 안 공작의 목소리는 낮고도 차갑게 울려 퍼졌다. 교수님은 이것이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의 대표작이라 설명했다. 말은 화자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정작 그 말의 이면에는 화자가 숨기고 싶은 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나는 충동처럼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의 초상화를 찾아보았다. 화면 속에서 마주한 그녀는 겨우 열여섯, 결혼과 죽음 사이에 갇힌 채 우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었다. 무거운 옷깃과 단단히 묶인 헤어스타일, 그리고 어린 얼굴의 긴장된 눈빛. 시 속 ‘마지막 공작부인’의 형상이 실존 인물과 겹쳐지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문학이 단순한 허구라 생각했는데, 그 뒤에는 실제 역사와 피가 있었다.


브라우닝의 시에서 공작은 살아 있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그림 속에 갇힌 아내를 더 만족스러워했다. 살아 있는 그녀는 예측할 수 없었고, 웃음을 나눠주었으며, 사소한 것에도 쉽게 감동했다. 그것이 공작에게는 불편하고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초상화 속 아내는 달랐다. 이제는 움직이지 않고, 오직 공작의 허락 아래에서만 커튼이 열렸다 닫혔다. 강의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공작은 예술 속 아내를 통제하며 현실을 대체하고자 했다. 살아 있는 존재보다, 죽은 뒤 그림 속에 남은 존재가 더 다루기 쉬웠던 거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어딘가가 쿡 찔린 듯했다. 우리가 타인을 향한 사랑이라 부르는 감정 속에도, 어쩌면 소유와 통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 않은가.


공작은 자신을 변명하려고 말한다. 그러나 독자는 그 말의 틈새에서 오히려 그의 질투심과 잔혹성을 읽어낸다.


“I gave commands; Then all smiles stopped together.”

(“내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미소가 함께 멈췄다.”)


이 대목은 아내의 죽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시가 단지 문학적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루머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는 열일곱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당시 사람들은 독살을 의심했다. 브라우닝은 그 실존 인물과 소문을 모티프로 삼아, 독백 속에서 은근히 독살의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서 들었던 섬뜩한 구절이 초상화와 역사적 기록 위에 겹쳐질 때, 그 무게가 두 배로 다가옴을 느꼈다. 화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독자는 그 속에서 인간 권력의 냉혹한 얼굴을 읽어낸다. 그것이 브라우닝의 아이러니였다.

나는 오래 전 미국에 건너왔다.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은 비지니스를 열고, 매일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스스로를 초상화처럼 고정된 이미지로 느낀 적이 있다. 이민자, 불법체류자, 가게 주인, 혹은 누군가의 엄마.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누군가의 눈에 걸린 하나의 이미지로만 읽혔다. 브라우닝의 공작부인이 커튼 뒤에 갇혀 있었듯, 나 또한 사회가 씌워놓은 커튼 뒤에서 평가받곤 했다. 웃음과 눈빛마저도, 때로는 ‘저 사람답다’는 틀 안에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은 언제나 그 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초상화 속에 박제된 얼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목소리로 존재하고 싶다.


영시 읽기 강의에서 배운 것은 단순한 시 해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이 인간 심리를 어떻게 비추는지, 말과 진실이 어떻게 어긋나는지, 그리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 존재가 어떻게 침묵당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었다. 브라우닝의 시에서 커튼을 걷는 권리는 오직 공작에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나는 그 권리를 내 손으로 되찾는다. 나 자신의 커튼을 스스로 걷어내고, 내 목소리를 세상에 내어놓는다.


초상화 속 공작부인은 더 이상 벽에 갇혀 있지 않다. 이민자의 삶 역시 타인의 시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 있는 얼굴, 살아 있는 목소리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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