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너머 스쳐간 노란빛, 오늘의 나를 붙잡다.
어느새 9월,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다.
이곳은 벌써 나뭇잎이 색을 바꾸고 있다.
초록은 옅어지고, 가지 끝마다 붉음과 노랑이 번져간다.
햇살은 여전히 뜨겁지만 바람은 차분해졌고,
하늘은 높아져 한결 투명하다.
가을은 늘 이렇게 조용히 다가와, 우리 마음을 먼저 흔든다.
오늘 차를 타고 가다 문득,
들판 한쪽에서 노란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들이 햇살을 받아 출렁이는 모습은
황금빛 파도처럼 눈앞에 번져왔다.
스쳐가는 풍경이었지만,
그 순간 마음은 단단히 붙잡혔다.
차창 너머의 장면은 오늘 하루의 가르침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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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늦깎이 대학생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교재 속에서 만난 워즈워스의 *〈수선화〉*는
오늘의 풍경과 겹쳐졌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Beside the lake, beneath the trees,
Fluttering and dancing in the breeze.”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고 있었네
골짜기와 언덕을 홀로 지나며
그러다 문득 눈앞에 펼쳐진 무리 ―
황금빛 수선화들이었네
호숫가, 나무 아래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다)
머리로만 이해하던 문장이,
오늘 차창 밖의 노란빛과 맞닿으면서
비로소 마음으로 들어왔다.
시는 풍경이 되고,
풍경은 다시 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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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떠오른 또 하나의 문장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였다.
>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돌아가리라, 내 밭과 정원이 황폐해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벼슬살이에 지친 그는 세속을 버리고
자연 속 삶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에게 밭과 정원은 단순한 생계의 터전이 아니라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자리였다.
> 勉從茲訓, 以究天年.
(이 가르침을 힘써 따르며, 천수를 다하리라.)
자연 속으로 돌아가 천수를 다하겠다는 결심은,
오늘 내가 본 들판의 노란빛과 겹쳐졌다.
꽃송이들이 무리지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듯,
공부 속 작은 깨달음이 모여
내 삶의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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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에게는 수선화가,
도연명에게는 고향의 밭과 정원이,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는
책 속 문장과 차창 너머의 풍경이 그러했다.
작은 순간들이 모여 계절을 바꾸고,
사소한 배움들이 모여 생을 이룬다.
나는 지금 늦깎이 대학생으로,
책과 자연이 건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시 살아가는 길을 배우고 있다.
오늘 차창 너머 들판의 노란빛은
워즈워스의 수선화를,
그리고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불러왔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를 일러준다.
그 자리는 멀리 있지 않다.
책 속의 한 구절,
차창 밖 스쳐간 풍경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