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는 일, 살아가는 일

드라마와 푸드트럭에서 만난 회복의 언어

by 운조



밤마다 우리 동네 길모퉁이는 멕시코 푸드트럭 불빛으로 환해진다.

타코 한 접시 속에 노동의 땀, 가족의 마음, 그리고 회복의 언어가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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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찾아오면 우리 동네 길모퉁이는 작은 축제처럼 변한다. 멕시코 푸드트럭들이 차례차례 불을 밝히고, 네온사인이 깜박이며 골목을 채운다. 철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또르티야, 숯불 위에서 고기를 써는 칼날 소리, 고수 잎과 라임 향이 섞여 공기를 가득 채운다. 겉보기엔 모두 같은 타코와 부리토를 파는 것 같지만, 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은 각기 다르다. 퇴근길 유니폼을 벗지 못한 노동자, 서로의 어깨에 기대 선 젊은 부부, 아이를 안은 엄마, 그리고 늦은 밤 외로움을 달래려 나온 이들까지.


 한 푸드트럭 앞에서 나는 작은 장면을 보았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아버지는 하루 일을 마치고 온 듯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아이가 주문한 타코를 받아 들자 그의 표정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는 뜨거운 또르티야를 조심스레 베어 물고, 아버지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피곤을 잊은 듯했다. 그 순간, 타코 한 접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게 한 삶의 보상, 회복의 징표가 되었다.


 레스토랑이라는 말의 뿌리가 restaurer, 곧 “회복하다”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모퉁이 푸드트럭은 화려한 레스토랑과는 거리가 멀다. 테이블보도, 은빛 식기도 없지만,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그 단어의 본뜻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기진 노동자에게는 힘을, 이주민에게는 자존감을, 외로운 이에게는 잠시의 위로를 건네는 장소. 그것이 곧 회복의 언어가 아닌가.


 드라마 《폭군의 셰프》는 이 오래된 진실을 다시 일깨운다. 폭군이자 절대 미각을 지닌 왕 연희군, 그리고 미래에서 온 셰프 연지영. 두 사람은 요리라는 무대에서 마주한다. 그녀의 요리는 권력 앞에서 생존을 위한 무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매개다. 절대 권력을 쥔 왕조차 음식 앞에서는 인간적 허기를 드러낸다. 칼날과 불길이 가득한 주방에서 요리사가 도달하는 진실은 단순하다. “음식은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푸드트럭의 주인들도 다르지 않다. 국경을 넘어온 기억, 이민자로서의 고단한 노동,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이 또르티야 한 장, 살사 한 숟갈에 스며 있다. 손님이 동전을 내고 타코를 받아드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회적 약속, “당신은 여기서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의 언어다.


 푸드트럭이 여러 대 서 있어도 장사가 되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회복을 원한다. 누군가는 매운맛 속에서, 누군가는 고소한 아보카도 속에서, 또 누군가는 친절한 인사 속에서 그 힘을 얻는다. 여러 대의 트럭은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회복의 통로가 되어 공존한다.


 오늘도 나는 길모퉁이에서 타코를 산다. 차갑게 식은 하루가 따뜻한 또르티야 한 장에 덮인다. 푸드트럭 불빛 아래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일으켜 세우는 가장 오래된 언어라는 사실을.


 음식은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살아라, 버텨라, 사랑하라.”


 그리고 나는 덧붙이고 싶다.

 먹이는 일은 곧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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