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의 신화 뒤에 남은 그림자에 대하여
아침부터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라디오를 틀자,
오늘이 콜럼버스데이라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학교도 은행도 문을 닫는, 미국의 ‘발견의 날’.
그런데 ‘발견’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 한켠은 조금 서늘해진다.
누군가의 발견이,
누군가의 잃어버림으로 시작된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
콜럼버스는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한 대륙에 도착해 그것을 ‘새로운 세계’라 불렀다.
하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새로운 곳이 아니었다.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에겐 이름이 있고, 언어가 있고, 신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들의 이름은 서서히 지워졌다.
역사는 늘 발견자의 이름으로 기록되고,
발견당한 사람의 이야기는 쉽게 잊힌다.
지난주 교회에서는 애리조나 선교 보고가 있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아직도 원주민 마을에는 깨끗한 물이 부족하고,
학교까지 몇 시간을 걸어가야 하며,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난다고 했다.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그 땅의 한 구석에서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며칠 전 산책길에서 나는 도로 표지판을 보았다.
나바호 드라이브, 아파치 로드, 아팔라치 애비뉴.
예전엔 그냥 미국식 이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르게 들린다.
그건 길의 이름이 아니라,
이 땅의 첫 사람들,
지워진 이름들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길로 남아 있다는 건,
적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이겠지.
콜럼버스에게는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일화가 있다.
그는 탁자 위에 달걀을 세우며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먼저 한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지.”
그 말은 오랫동안 개척과 창의의 상징이 되어 전해졌다.
달걀은 세상을 세운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 〈The Egg〉 속 아버지는
전혀 다른 달걀을 품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닭으로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양계장을 열고, 알을 팔며 희망을 걸었지만
닭은 병들고, 알은 썩어갔다.
결국 그는 달걀로 묘기를 부리다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자존심과 꿈이 함께 깨져버린다.
앤더슨은 그 아버지를
“달걀처럼 금이 간 사람”으로 기억했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세상을 세웠고,
앤더슨의 달걀은 그 세상 아래에서 깨졌다.
한쪽은 발견의 상징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부서진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나는 그 두 개의 달걀 사이에
이 땅의 원주민들을 떠올린다.
역사 속에서 이름을 잃었지만,
여전히 길 위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세워진 세상의 밑바닥에서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콜럼버스의 달걀은 세상을 세웠지만,
그 세상은 누군가의 껍질 위에 세워졌는지도 모른다.
앤더슨의 아버지는 그 껍질 아래서 꿈을 잃었고,
인디언들은 그 껍질 속에서 이름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도로 이름 속에,
아이들의 웃음 속에,
낡은 마을의 바람 속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오늘도 파란만장한 하루겠지만,
나는 문득 생각한다.
깨진 껍질 사이로도 햇살은 들어온다는 것을.
세워진 사람과 부서진 사람,
그 모든 삶이 겹쳐져
이 땅의 오늘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게 바로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