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 어떤 봄
“기억 속 어떤 봄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이 됩니다. 라일락이 피려는 계절, 조용한 부활의 향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어제 비가 왔다.
세상은 조용히 젖었고, 아침이 되자 초록은 어제보다 한층 짙어 있었다.
나는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비가 오면 초록은 더 짙어지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런데 오늘, 라일락이 피려고 한다.
보랏빛 꽃눈이 가지 끝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다.
향기가 아직 입 속에 맴도는 것도 아닌데,
그 조용한 기척만으로도 내 마음 어딘가가 흔들린다.
언젠가 읽은 문장이 떠올랐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길러낸다...”
— T.S. 엘리엇, 『황무지』
죽은 땅, 기억과 욕망, 봄비, 라일락.
삶과 재생, 그리고 눈물 같은 것들.
라일락은 그런 시기, 슬픔을 안고 피어난다.
그 향기 안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네흘류도프와 카츄샤가 처음 마주한 날도, 라일락이 피던 봄날이었다.
그 향기로운 오후가 훗날 영혼을 뒤흔드는 회한으로 남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The lilacs were in bloom, and the scent came in through the open window.”
— Resurrection, Leo Tolstoy
(라일락이 활짝 피었고, 열린 창문으로 향기가 스며들었다.)
기억의 향기는 가끔 인생을 되돌린다.
가끔 고통을 시작하게 하고,
가끔 그림자처럼 그 사이에 가지를 드리운다.
꽃이 피는 순간은 가지를 드러내고,
무엇인가를 막 시작하는 것과 같다.
새 계절을 만드는 계절, 봄
무언가를 피워낸다는 것은,
그 안에서 무언가가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는 뜻이다.
라일락이 피려고 한다.
나는 그 향기를 기다린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
다시, 부활하기 위해.
나는 아직 살아서, 희망을 적는다.
봄은 참 기묘한 계절이다.
도저히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자리에서
어느 날 조용히 살아남은 감정이 피어난다.
누군가에게는 기다려지던 계절이겠지만,
나에게 봄은
다시 아이를 안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가장 잔인하고 가장 기도하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스물몇 살이었고,
죽을 만큼 아팠다.
의사도, 가족도, 나도
살아날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진짜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아났다.
아니, 살아내야 했다.
세 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그 아이의 얼굴이었다.
간호사는 말했다.
“회복이 빠르시네요.”
나는 웃었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나는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야 했기 때문에 버틴 것이다.
곁을 지켜준 막내동생이 있었다.
묵묵히 병간호를 하며,
아들의 손을 대신 잡아주었다.
그 손길들이,
나를 지금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이 봄을 걷는다.
꽃은 여전히 눈부시고,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고 있다.
하지만 나의 봄은
그때 그 자리에 멈춰 있다.
지금도 종종 나는
그 병원의 희미한 천장 아래
다시 누워 있는 나를 본다.
그러면 한 가지 말이 떠오른다.
“그때, 참 아팠지.
그래도, 살아줘서 고마워.”
다시 피어나는 당신에게
지금 이 봄이
당신에게도 고통이라면,
부디 기억해 주세요.
봄은 누구에게나 반가운 계절은 아니며,
어떤 봄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 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철쭉은 피고,
라일락은 향기를 퍼뜨리며 매년 다시 오지만,
당신은 그 한 해를
단 한 번, 용기로 견디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작지 않은 일입니다.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때로는 시보다 깊은 희망입니다.
라일락이 피려고 하네.
나는 그 향기를 기다립니다.
나처럼
한때 죽음 가까이 있었던 사람도,
지금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아파하고 있는 누군가도
그 향기 앞에서 조용히 살아지기를.
다시 피어나는 당신에게,
이 계절이 부디
가장 조용한 기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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