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고 싶은 사람 있으세요?
그는 밤이면 색소폰을 불었다.
작은 무대 위, 흐린 조명 아래, 반쯤 감긴 눈으로 선율을 밀어 넣던 남자.
조용한 오르간 반주가 흐르고, 진한 위스키 잔 옆에 놓인 마이크는 노래를 기다렸다.
세 번째 곡이 끝날 무렵, 그는 늘 같은 말을 꺼냈다.
“오늘, 보고 싶은 사람 있으세요?”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히 보고 싶었던 사람은,
그 무대 아래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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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는 관광비자로 미국에 들어왔다.
이혼 후, 아들 성우는 한국의 먼 친척 집에 맡겨진 채였다.
처음엔 몇 달만이라 생각했다.
번듯한 일자리만 구하면 아이를 데려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악보보다 더 복잡한 음표들이었다.
저녁이면 허름한 클럽의 무대에 섰고,
낮에는 창고에서 짐을 날랐다.
신분이 없다는 이유로, 그 어떤 계약서도 병태를 품지 않았다.
돈은 손에 들어왔지만,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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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를 데려온 건 그로부터 2년쯤 뒤였다.
브로커를 통했고, 멕시코를 경유했다.
작은 트렁크 안, 아이는 몇 시간을 견뎌야 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쉰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던 성우는,
미국 땅을 밟자마자 조용해졌다.
그날 이후, 그는 밤마다 이를 갈았고,
잠결에는 울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병태는 알았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이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그는 그날 이후, 웃는 법을 잊었다.
색소폰에서도, 노랫말에서도, 웃음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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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병태는 한 미용실에서 영순을 만났다.
시민권자인 그녀는, 처음엔 그를 무뚝뚝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나 말 없는 손끝, 세탁기에서 걸어 나온 셔츠처럼 매무새를 고치던 그의 표정을 보며,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저 남자에게도 누군가의 이름이 있었겠지.'
둘은 가까워졌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영순은 그의 신분조정 서류를 준비해주었고,
병태는 드디어 어딘가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생활은 매끄럽지 않았다.
수입은 늘 부족했고, 병태는 밤마다 뒷골목 업소를 전전했다.
마침내 다툼이 시작되었고, 그날 밤 영순은 서류를 철회했다.
“당신, 나 없인 아무것도 아니야.”
그 말은 짧았지만, 깊었다.
병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이 땅에서 다시 이름 없는 자로 돌아갔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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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초인종이 울렸다.
이민국 직원이었다.
영순의 철회 요청이 아직 처리되지 않았던 덕분에, 병태는 붙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안다.
그 순간의 불안은 이미 등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삶 전체를 집어삼켰다는 것을.
그날 밤, 그는 조용히 짐을 쌌다.
성우의 손을 잡고, 동네를 빠져나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도망이 아닌, 생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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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LA 외곽의 동네에서 제시카를 만났다.
이혼 후 혼자 살고 있던 한국 여성이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듣긴 했지만, 내 속은 몰랐어요.”
제시카는 미국인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그렇게 정리했다.
병태는 조심스러웠다.
제시카도 그랬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서로의 온도를 알아갔다.
성우는 제시카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제시카는 그 이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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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 시간은 조용했고, 안정적이었다.
늦은 밤, 마트에서 돌아오다 성우가 말하곤 했다.
“아빠, 여긴 따뜻해.”
병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그래.’
제시카는 병태의 신분을 정리해주었다.
긴 서류 절차와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는 합법적 체류자가 되었다.
그날, 그는 먼지 쌓인 색소폰 케이스를 열었다.
조심스럽게 리드를 갈고, 입김을 불어넣었다.
처음엔 삐걱거리는 소리뿐이었지만, 곧 오래된 기억처럼 음계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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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태는 다시 밤에 색소폰을 분다.
이젠 무대도, 박수도 없다.
하지만 그가 뿜어내는 소리는
이름을 되찾은 한 남자의 숨결이자,
오랜 죄책감과 상처 위에 얹은
조용한 회복의 선율이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한 것으로, 특정 인물이나 사실을 단정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