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언제나 계절의 풍경들을 닮아있다. 나의 감정들은 그 계절 속에서 피어나고 져버리니 나는 언제나 계절을 순환하면서 살아가는 방랑자와 같다. 방랑자. 나는 방랑자이니 한 계절의 지나감을 안타까워하면서 모든 계절에 진심으로 뿌리 깊이 소속되려 하는 다양한 이들을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했다. 나는 그들과 같이 되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니, 그래서 나는 결국 스스로에게 방랑자라는 이름을 붙이고야 만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의 계절을 다채롭고 아름다운 계절로 여긴다면 그것은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계절들은 색채가 있더라도 기본적으로 회색빛을 가득 담은 무채색의 계절들이었으니.
과거에 대한 단편은 여전히 외롭고도 외로웠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날은 춥고도 어두운 겨울의 초저녁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나를 짓누르는 고통을 피해서 잠을 잤다. 끝도 없이. 그 미약하고도 의미 없는 반항이 끝나고 난 후, 나는 내 온 존재를 짓누르는 무기력함과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이 무기력함이 끝없이 나를 짓누르더라도, 나는 어떻게든지 움직여야 한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서 밖으로 나간다. 해 질 녘의 저녁 풍경과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무기력으로 잠식되어 있는 나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막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불빛이 깜박깜박 점등하고 있다. 그 불빛이 나를 강하게 이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일말의 희망을 잡아보려 한다. 닿을 수 없는 불빛을 향해서 손을 뻗어본다. 조그마한 희망을 한 손에나마 그려 잡을 수 있을까 하고.
이내 걸음을 돌려서 다시 터벅터벅 삶으로 돌아온다. 그저 무감각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지나가는 이들의 표정을 바라본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삶에 대한 무상함을 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백지와 같다.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다 보면. 삶에 대한 한없는 무상함을 느낀다. 마치 회색빛이 가득 찬 터널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듯하다. 끝도 없는 외로움은 고독이 되어서 나를 질식시키려 한다. 아무도 진심으로 만날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죽음을 갈망한다. 탈출을 갈망한다. 그 욕망이 나의 내면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회색빛의 하루가 끝나갈 때쯤, 나는 어김없이 약을 한 움큼 집어서 삼킨다. 나를 조금이나마 마비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내일은 조금이라도 나의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면서.
밤 새 하얀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아침의 차가운 바람이 다시 나를 깨운다.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만 한다. 삶의 중압감이 나를 짓누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걸어가다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너무나도 투명한 카페의 유리창을 통해서 다 함께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못나고 못난 나는 질투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본다. 나의 외로움은 불같은 질투와 분노가 되어서 불타오른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본다. 내리는 눈에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모두 지워진다. 흰색 도화지와 같은 풍경 속에서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채로 멈춰 선다.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못난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헛헛한 마음이 되어서 얼어붙는다. 나는 스스로라도 그 얼어붙는 마음을 애틋하게 끌어안는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얼어붙는 마음을 모두 녹일 수는 없다. 외로움과 무상함이 나를 다시금 감싸온다.
차갑고도 외로운 겨울이 지나간다. 봄이 다가온다. 모든 것이 싱그럽게 각자의 생명을 피워낸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머리 위로 봄 비가 내린다. 이 무채색의 세상 속에서라도 나는 왠지 모르게 비 오는 날에는 다채로운 세상을 떠올려보고는 한다. 비는 모든 것을 씻겨내리니 아마 나의 세상 역시 씻겨내려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을까. 그렇게 비가 모든 것을 씻겨내리는 와중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이를 떠올린다. 왠지 이 비 오는 날의 풍경을 닮은 그 아이를 떠올린다. 음울한 표정 속에서 발그레한 미소가 피어져 나올 때 이상하리만큼 화사한 그 아이를. 나의 마음은 그 아이로 한없이 끌려들어 간다. 사랑. 마음속에서 사랑이 울린다. 그 사랑 속에서 나는 조그마한 희망을 마주한다.
터벅터벅. 희망의 발걸음으로 따스한 햇빛이 비추는 세상 속으로 걸어간다. 혼자서라도 밝은 노란빛으로 피어나는 민들레를 닮은 그 햇살의 풍경이 내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준다.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들 싱그럽게 피어나려 한다. 사람들을 다시 마주한다. 백지와도 같은 그 얼굴에서 다채로운 물감을 칠한 듯 형형색색의 감정을 마주한다. 타인의 미소가 나의 세계를 잠시나마 희망으로 이끈다. 따스한 햇살을 닮은. 그래서 너무나도 따듯하게 마음을 울리는 세상을 떠올려본다. 나는 그제야 지나가는 계절이라도 한껏 소속되려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들이 왜 그렇게나 하나하나의 풍경에 뿌리깊이 내려서 살아가려 하는지 이해한다.
그 아이가 나에게 건네준 초콜릿을 주머니에서 꺼내서 먹어본다. 달콤 씁쓸한 초콜릿을 입에서 굴려본다. 때로는 씁쓸한 맛이 너무나 강하게 올라와 표정을 찡그리게 된다. 때로는 달콤함이 나를 감싸 온다. 기분 좋은 설렘이 올라온다. 나는 그제야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토록 다채로워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세계를 바라본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마주한다. 그제야 나는 진심으로 우리의 세계를 그려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