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히려 더 좋다 Mar 22. 2023

느린 일상 속에 혼자 바쁜 우체통

     #독일생활 #우편문화 # 적응기 #느리게 살기

모든 것이 느렸다... 느리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느림이 주는 사소한 기쁨과 행복


조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주지 등록을 해야 했다.

등록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조직 내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인정되고 조직으로부터 관리받아야 했다.

관리받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각한 코로나 시기였던 만큼, 조직(정부)의 관리, 보호체계로 서둘러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거주지 등록이 선행되어야 일련의 다른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코로나 백신접종에 대비해서라도 필요한 모든 공식적 신고와 등록절차를 서둘러 마치려는 것이 당시의 가장 큰 이유였다.

 

우선적으로 거주지 주민등록 (Anmeldung)을 하기로 했다. 등록은 비교적 간단했다. 여권, 아파트 계약서, 신청서를 작성해서 시청(관청)에 가면 되었다.  Anmeldung은 독일 입국 후 처음 발생한 독일의 거주지를  신고하는 것이다.


"독일땅에서 존재를 처음 신고하니 출생신고네...."


"그렇네......."


아내의 농담 삼아한... 해석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외국인으로서 독일이라는 땅에 처음으로 존재를 신고하는 것이니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럭무럭 잘 자라서(적응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기를....


Anmeldung이후, 이사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전입신고에 해당하는  Ummeldung을 해야 한다.  


참고로, 독일에서 더 이상 살지 않고 한국으로 귀국할 경우도 "나 더 이상 독일에 안 살 거야" 신고를 해야 한다. 이 신고를 Abmeldung이라고 한다. 현지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거주지 등록과정이 복잡해 보이지만... 막상 해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잘 모를 땐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나..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


외국인 신분으로 독일에 살다가 영구귀국 할 경우,  Anmeldung과 Abmeldung은 한 번씩 Ummeldung은 이사 횟수만큼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독일에 조금 오래 살 계획이 있다면, 기본 상식 수준에서 반드시 알아두었으면 한다. 세계 어디서든지 현지의 정해진 절차와 법규를 잘 지키려는 자세가 현지 생활을 순조롭게 하는 지름길이다. 하나의 절차가 어긋나면...  반드시, 고난의  절차가 기다리고 있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Anmeldung (처음 도착 시) --> Ummeldung(이사 시)--> Abmeldung (영구 귀국 시)


구두로 설명할 때... An과 Ab의  구분이 잘 안 가는 발음으로 인하여,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따로따로 인 경우가 있으니  일아서 잘 새겨 들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말보다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우리의 경우, 임시숙소에 머무는 동안 Anmeldung 했고 장기거주용 새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Ummeldung을 했다. 내외국인 막론하고 누가 언제 들어와서 어디에 살고, 이사하고, 밖으로 나갔는지 관리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조직에는 가입하고 떠나는 절차가 다 있는 법이다. 영화에 나오는 조직(?)을 떠날 때만큼의 살벌한(?) 위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규정과 절차를 잘 지켜서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불이익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시하다가는 엄청난 불편함을 맞이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을 듯하다.


Anmeldung과 Ummeldung 신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주지 증명서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다음 정착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기본 서류 하나가 더 구비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의 소통거점(여기 있어요... 여기로 주세요...)이 개설되었음을 상징했다.


다음 적응절차에서 이 서류가 매번 필요했다. 그만큼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분실하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했다. 원본을 따로 보관해 놓고 사본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아 사본을 준비해서 필요할 때마다 사용했다. 기본적으로는 원본을 요구했지만 사본을 제출해도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회사, 은행, 전화, 도서관, 병원, 외국인청.. 등이 거주지증명서를 요청했던... 지금.. 당장 생각나는 다음 절차에 해당하는 기관이다. 거주지 등록증이 없으면 다음 일이 아예 진행이 되지 않는다.


거주지 등록증은 나와 기관들이 연락되는 소통의 거점을 의미한다. 각 기관에서 보내는 우편물이 거주지 등록증에 표시된 주소로 하나씩.. 둘씩.. 차곡차곡.. 날아들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우편물에 놀랐다. 우편물이 계속 배달되어 오고.... 가끔씩...  넘치는 우편물을 다 소화하지 못한 채 하얀 혀(봉투)를 내밀고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우편함을 목격하고는 한다.




거주지 증명서를  발급받은 후, 장기 거주허가증 (Blue card) 발급을 위한 절차를 진행했다. Blue card는 전문인력 고용 비자로 한 번 발급받으면 4년간 유효하고 영주권 신청이 다른 비자에 비하여 비교적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장기거주라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었고 영주권 관련해서는 지금 당장의 일이 아니라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누가 알겠는가?


영주권이 필요하다면 상대적으로 쉽게 취득할 수 있으니 이 비자의 장점이 큰 것만은 사실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외국인청이 모두 폐쇄되었고 모든 일이 우편과 이메일로 진행되었다. 필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거나 외국인청 정문에 준비된 메일박스에 직접 가서 투입하는 방법이 있었다.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직접 투입하고 인터뷰 날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독일은 아직도... 이메일보다 우편이 대세인 아날로그 문화이다. 대부분의(거의 모든..) 서류는 우편으로 주고받는다. 아날로그 문화는 사회가(생활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메일로 금방 끝날 일도 우편으로 매번 해결해야 하니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게 느리다.


아직 독일 우편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약간의 불평은 하더라도 비난은 하지 말자는 것이 우리의 기본 관념이다. 모든 문화에는 그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을 것이므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해...  비판


느리게 돌아가는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스스로 적응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 현명한 방법이었다.


우편문화가 주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으니..

매일마다.. 우편함을 열어보고 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어떤 소식이 왔나?


낚시 갔을 때.. 입질은 뜸하고..

괜히 어망(살림망)을 들쳐서 몇 마리 안 되는 물고기수를 헤아려볼 때의 느낌..


오늘은 어떤 고기를 잡았나?




배달되는 우편물의 대부분을 절대 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언(충고)을 들었다.  향후,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재확인이  필요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 우편물을 다시 들쳐보아야 하는 경우가 반드시 생긴다고 했다. 조언이 정확한 사실로 확인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벌어지고는 했다.


우편봉투를 개봉할 때마다 페이퍼 나이프를 사용하여 가능한... 정성 들여... 여는 것을 나만의 의식(?)으로 세워놓고 있었다.  우편물이 배달해 오는 저마다의 소식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예의... 사소한 기쁨... 그런 것이었다.


이 의식이 아주 현명했다는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작은 결과물로(?) 확인되었다. 봉투의 개봉을 깔끔하게 한 일련의 의식은... 많은 우편물이 잘 정돈되고, 맵시 있게 보관될 수 있는데 도움이 되었다.  잘 정돈된 파일을 살펴볼 때마다 뭔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중학생시절... 새 학기 노트 사다가 과목별로 제목과 이름을 정성 들여 쓰고.. 책꽂이에 반듯하게 꽂아 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느낌....


느림에서 비롯된... 사소함이 주는... 조그만 행복 그런 것....




느림이 좋다... 아날로그 문화가 좋다... 따뜻한 손길이(라기보다는 추억이) 느껴져서 좋다.


커피로 치면 드립커피다.


드립커피를 즐기고 좋아한 지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수 십 년 전...


커피 자체도 좋지만... 준비하고 마시는 과정을 더 좋아한다.


우리에게(나, 아내)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정을 마시는 것"이다.


원두를 핸드그라인더로 천천히 정성 들여 갈아놓고...

커피물을 데워 살짝 식도록 놓아두고...

드립필터의 바닥과 옆면을 한 번씩 역으로 접어 드리퍼에 올리고...

갈아놓은 커피가루를 조심스래 옮겨 담아서...

드립포트로 천천히...

커피물을 내린다...

사방에 은은히 퍼지는 커피 향...

커피 향만큼이나 부풀어 오르는 브래드...

드립서버에 내려진 커피를...

가장 좋아하는 커피잔에 조심스래 옮겨서..


(달그락 거리는 유쾌한 소음과 함께...)


커피 향부터...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 모금... 한 모금...

지나간 추억과...

지금의 행복...

내일의 상상행복...

커피와 함께 마음속에 차분히 가라앉는다.


커피를 마시는 과정이 좋다..

좋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향이 더욱 짙어진다.

거실 밖으로 내어다 보이는 풍경이 더욱 사랑스럽다.

거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 운무가 언덕에 걸쳐있다.
노란 튤립이 봄의 정경에 운치를 더한다.
빨간 튤립과 이름 모를 꽃이 사랑스럽다.


옛 친구의 반가운 편지가.. 오늘... 우체통에 있을 듯한 착각이 든다...




Blue card 발급 마지막 절차로  인터뷰 날자가 잡혔다.

질문이 무엇일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기로 했다.


인터뷰 당일, 인터뷰는 간단히.. 아주 간단히.. 끝났다.

담당자가 서류를 간단히(이미 자세히 검토한 뒤였겠지만..) 살펴보고 빠진 항목을 체크하는 듯했다.  
 

"눈동자 색깔이 무엇인가요?"

 

"브라운이요."
 

"................."

  

"수수료 지불하시고 가시면 됩니다."


 "................."


 "Danke schön"

 
 담당자 사무실을 나왔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며 준비했던 일인지라 조금은 허무했다.  
 

"왜? 보자고 한 거지..."


 ".............."


아내와 둘이 멋쩍은 눈웃음을 마주쳤다.


또.. 하나의 절차가 무사히 끝났음을 교감하는 안도의 한숨을 포함한 미소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Blue card를 자랑스럽게(?) 가슴에 품고 우리를 기다리는 우편함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외국인청에 갈 필요가 없는 장기적인 합법적 신분을 확보한 것이다.


이제 천천히... 또..

다음 과정의 즐거움 기다리며...


작가의 이전글 재미있는 독일 아파트 구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